‘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춘향뎐’ 등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의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세계를 고집해온하면서 영화계의 선후배는 물론 문화 예술계 안팎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온 ‘국민감독’ 임권택. 그가 27일 오전 칸 영화제 시상식장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마침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베니스와 베를린 등 다른 영화제에 비해 유난히 콧대가 높았던 칸 영화제가 드디어 임권택 감독의 40년에 걸친 외길 영화 인생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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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영화'취화선' 작품사진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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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서울 관객 100만명 돌파(93년·서편제)와 국내 영화 최초의 칸 영화제 본선 진출(2000년·춘향뎐)을 일궈낸 ‘이 시대의 감독’이자 강수연(베니스영화제, 모스크바영화제) 신혜수(몬트리올영화제) 오정해(상하이영화제) 등을 통해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국제적 감독’이었다. 이 같은 업적으로 1993년 동아일보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로 뽑혔고 올해 초에는 동아일보가 제정한 일민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40여년 ‘영화 인생’은 영화보다 더 기막힌 ‘인생의 드라마’로 빛난다. 어린 시절 그는 좌익활동을 한 아버지의 그늘 때문에 가출해야 했고 지게 품팔이와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처음으로 ‘영화라는 것’과 인연을 맺은 때가 19세 때인 55년. 하지만 그에게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식사를 나르고 무거운 촬영 도구를 운반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대신 하루 세끼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는 소도구 조수와 조감독 등을 거쳐 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통해 영화감독이 됐다. 이때부터 ‘취화선’까지 그가 찍은 영화는 무려 98편. 제작자의 ‘주문’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영화는 물론 반공을 내용으로 한 홍보 영화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한해 7편까지 연출했던 그는 “80년대 이전 영화들은 내게 원죄 같은 것”이라며 뼈아픈 고백을 털어놓곤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작품 연보)’에는 한(恨)이 서린 개인사와 굴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부침을 거듭해온 한국 영화의 어제와 오늘이 동시에 담겨 있다.그래서 칸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은 더욱 당당하고 감동적이다.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는 우리 고유의 문화로 세계라는 큰 꽃밭의 한 작은 꽃이 되고 싶습니다.” 어눌한 말투에 실린 그의 영화 철학은 ‘취화선’의 화면처럼 소박하지만 힘이 넘친다.그는 43세에 뒤늦게 자신이 ‘채령’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영화배우 출신 채혜숙씨와 결혼했다. 두 아들도 모두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영화가족’이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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