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죽음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관련 직접 증거가 은폐됐거나 유실돼 완벽하게 사인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최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불법 연행돼 조사를 받던 1973년의 시대적 상황과 수집 가능한 정황 증거에 비추어 판단을 할 도리밖에 없다.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장기간 폭넓은 조사활동을 통해 최 교수가 고문치사당한 뒤 내던져졌거나 직접 타살이 아니더라도 수사관들의 고문 협박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정했다. 진상규명위가 비록 직접적인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최 교수의 죽음에 불법적인 국가폭력이 개입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의미가 크다.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 지하실에서 최 교수를 조사했던 수사관은 아직도 완강하게 ‘투신 자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더라도 그 시대의 최고 지식인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몰고간 절망과 공포도 바로 국가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인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는 지식인들의 저항과 반대를 짓누르는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과 숱한 인권유린을 낳았다. 유신치하에서 중앙정보부에 긴급조치 위반 또는 간첩 사건 등과 관련해 조사를 받은 피의자들은 한결같이 너무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워서 기억하기도 싫을 만큼 처절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수사 관계자들은 잠을 재우지 않은 것 외에 고문이 없었고 최 교수가 동베를린에 다녀온 것을 자백했다고 주장했지만 잠을 재우지 않은 것도 명백한 고문행위이다. 유신시대 중정 지하실에서 최 교수만 ‘신사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고문은 인간의 심신을 극도로 무력하게 만들어 동베를린 구경을 못한 사람도 동베를린에 다녀온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진상규명위가 최 교수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신청하기로 한 것은 억울한 죽음의 신원(伸寃)을 넘어 국가폭력의 과오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