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기간을 두 달 남겨놓고 아예 측근들이 자네가 기자회견하는 것조차 막은 이유를 알겠네. 질문을 받고 자네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두려웠던 게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 말귀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네. 단어하고 문장을 범벅을 만들어 하는 말이 처음에는 귀엽게도 보였네. 그러다가 차차 근심되기 시작했네….”
미국의 마이클 무어라는 영화제작자 겸 작가가 쓴 ‘멍청한 백인들’(나무와 숲 펴냄, 김현후 옮김)이라는 책에 나오는, 저자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이다.
최근 부시 대통령이 미국 공화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왜소 종족인 ‘피그미(Pigmy)’라고도 하고 ‘밥상머리에서 버릇없이 구는 아이’라고도 했다는 말이 ‘뉴스위크’에 실렸다. 무어씨처럼 미국 시민이라면 ‘꼭 부시 대통령다운 말을 했군’이라며 그냥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그렇게 간단히 우스갯소리로 소화할 수 없는 ‘막말’로 들린다.
▼대화하자는 건가,아닌가?▼
우선 황당하다. 지금 북-미 관계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처음으로 미국의 대북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느니 어쩌느니 하며 대화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북한 스스로가 미국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있는 상황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런 북한에 대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했다. 북측이 늘 남측 인사들에게 하는 얘기는 “미국이 제발 우리 체제를 건드리는 말만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은 체제를 건드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대한 장군님’을 극단적으로 모독하는 발언을 했으니 북한의 심사는 알 만하다.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해 누구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드러났다.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갖고 있다”(2001년 3월)고도 했고 “김 위원장이 지나치게 의심스럽고 비밀스러운데 실망했다”(2001년 10월)고도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김 위원장을 비하한 것은 처음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얼마 전 북한을 여전히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했다. 이런 마당에 북한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북-미 대화에 나서겠는가.
부시 대통령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대화에 나서려는 북한을 더욱 궁지로 몰아 ‘두말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었는지,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기 위한 구실을 만든 건지 모르겠다. 무의식 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상식 이하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해도 ‘두말 못하게’ 항복을 받는 길은 전쟁뿐이다. 구태여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공은 평양에 넘어가 있다”는 등의 가식적인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 즉흥적인 감정의 표현이라 해도 문제는 심각하다. 첫째는 미국 대통령의 의식수준이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멍청한 백인들’에 나오는 얘기처럼 부시 대통령의 ‘학습 불능증’ 때문일까. 그런 대통령에게 어떻게 지구촌의 리더십을 맡길 수 있겠는가.
둘째는 솔직히 말해 불쾌하다. ‘피그미’족은 평균 신장이 150㎝도 되지 않는다. 현존 인류 중 가장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종족이다. 김 위원장을 ‘피그미’로 비유한 것은 혹시 무의식 중에 그런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우리의 뜻 전해야▼
우리 정부도 내심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당사자가 아닌 입장이니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라는 말을 하기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남북대화나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우방인 미국 대통령이 왜 그렇게 자꾸 ‘찬물 끼얹는 얘기’를 하는가. 우리 정부가 북한을 대변해 나서라는 말이 아니다. 내부적으로는 미국에 어떤 유감을 표명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더욱 더 당당하게 우리의 의견을 밝히고 따져야 한다는 얘기다.
한미 공조는 왜 강조되는가. 미국 대통령이 북-미 대화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발언을 해도 모른 척하는 게 공조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마치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눈치만 보고 침묵한다면 정말 사대외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 않겠는가.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