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프랑스전 직후, 수원월드컵 경기장 공동취재구역. ㄹ(리을)자로 된 통로로 선수들이 쏜살같이 빠져나가자 내외신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한마디라도 더 얻기 위해 장외 혈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내가 느낀 ‘킬러들’의 답변 유형.
먼저 ‘햄릿형’. 쉽게 답하지 않고 망설인다. 질문에 대해 고뇌한다. 박지성이 대표적이다. “골을 넣었을 때 기분은?” “글쎄요…” “어느 포지션이 잘 맞습니까?” “…글쎄요” “글쎄요 말고 다른 말은?” “아…글쎄요.”
두 번째로 ‘대변인형’. 기자들로서는 아주 반갑다. 성의껏 답할 뿐만 아니라 간혹 묻지 않은 말도 한다.
국가대표급 해설위원 1순위로 꼽히는 이영표가 대표적이다. 질문의 핵심을 재빨리 간파한다. “전반 초반에?” “아, 그때 우리는 아직 몸이 덜 풀렸습니다. 그러나 선취점을 줬지만 곧 상황을 수습해서 반격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후반 들어?” “잠깐 허둥댔지요. 하지만 우리 미드필더들이 몇 번 약을 올리니까 드사이, 비에라도 제풀에 지치더군요. 다음 질문 없습니까?”
세 번째로 ‘관록파형’.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에게서 흠씬 묻어나는 자욱한 흙 냄새. 거칠지만 매력적인 언어로 정곡을 찌른다. 유상철이 대표적이다. “몸싸움에 밀리지 않았습니까?” “한두 번 툭툭 부딪혀보니까 아 이 정도면 되겠다 싶고.” “후반에 중앙수비를 맡았는데 편한 자리가 따로 있습니까?” “편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이밖에도 많은 유형이 있다. ‘돌출형’ 이천수. 난데없는 답변을 곧잘 한다. “내가 변했는지 히딩크 감독이 변했는지, 어쨌든 요즘 플레이가 잘 되고는 있어요.” ‘천진난만형’ 최태욱. “날씨도 좋고 컨디션도 좋아서 플레이도 잘 돼고….” 그리고 ‘언급회피형’ 홍명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궁금증을 낳는 사나이.
역시 가장 흔한 유형은 ‘범생형’. 하나같이 “국민의 성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다. 거의 매일 듣는 답답한 말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면 이해가 간다. 우선 선수들은 감독의 전략전술에 대해 말을 삼가는 것이 보통이다. 기자들도 잘 묻지 않는다. 게다가 기자회견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혼잡하다. 답변하고 있는 도중에 다른 질문에 끼어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곤하다. 인터뷰에 응할 에너지가 있으면 전후반 90분에 다 쏟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운동장에서 공만 찬 선수들이 뭘 알겠느냐’는 편견이다. 정말 그릇된 시각이다. 묻는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물을 뿐이다. 이천수 최태욱 송종국 이영표 등 젊은 선수들은 ‘제발 질문의 수준을 높여 달라’고 주문한다.
중요한 것은 난해한 용어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핵심적인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 “좌우의 빈 공간이 많이 보였습니까?” 순간 송종국의 눈이 번쩍 뜨인다. “리자라쥐가 치고 올라오지 않아서 전반에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컨디션이 안좋다는 걸 알고 몇번 신경전을 벌이니까 공간이 열렸습니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수비들 사이로 빈 공간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이 이번 경기의 큰 성과입니다.” 자, 이 정도면 어떤가. 그 순간 송종국의 눈은 치밀하고 영리하게 빛났다.
축구칼럼리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