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즐겼던 유럽 사교계의 '살롱 귀부인'
동과 서의 차 이야기/ 이광주 지음/ 394쪽 2만원 한길사
‘마음과 몸이 한가로울 때/ 독서와 시 읊기에 지쳤을 때/ 마음이 어수선할 때/ 가곡을 들을 때/ 노래가 파하고 가락이 끝났을 때/ 문을 닫고 바깥일을 피할 때/ 북 치고 거문고를 타며 그림을 볼 때/ 깊은 밤 이야기를 나눌 때/ 밝은 창가 깨끗한 책상을 마주할 때/ 그윽한 방이나 아름다운 누각에 있을 때/ 앉아서 손님이 찾아왔을 때’(허차서의 ‘茶疏’)
이럴 땐 무엇을 하면 좋을까? 향긋한 차 한잔!
1988∼1990년에 실시된 조사는 1년동안 미국인들은 200잔의 홍차를, 러시아인은 500잔, 프랑스인은 100잔, 독일인들은 160잔, 영국인은 1500잔이 넘게 차를 마신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전 세계 170여개국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마시는 차의 양은 어림잡아 20억잔. 단순한 음료 이상으로 ‘차’를 다룰 수 있는 것은 각 나라의 문화적 상황에 맞게 자리잡은 ‘차문화’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예술이다.’(중국 작가 린위탕·林語堂)
‘차는 우리를 진지하고 매력 있고 철학적이게 해준다.’(아일랜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
저자는 서문에서 ‘20여년전 지리산을 마주보는 쌍계사에서 한 스님에게 차를 대접받은 뒤, 홀연히 하나의 ’의미‘로 차가 다가왔다’고 밝히고 있다.
청대 궁정 귀족 가문의 차 마시는 풍경도. 사진제공=한길사
글을 쓴 인제대 이광주 명예교수는 차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부터 시작해 일본을 거쳐 유럽까지 꼼꼼히 훑어 나간다. 차문화의 흐름과 차의 전파 경로를 좇으면서 동시에 주변의 차와 관련된 얘기거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마음먹고 나선 여행길에 길가의 풀꽃까지 살피려는 ‘세심함’과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도 함께 엿보인다.
최초의 다인(茶人)이라는 중국 당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차에 관한 최고의 고전으로, 이 책으로부터 인류의 차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의 기원과 제차 기구, 제차법과 다기, 차 끓이는 법과 차 마시는 규범 등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해 열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육우의 도’ 나아가 동양의 차문화는 ‘다선일미(茶禪一味)’로 요약할 수 있다. ‘차 그 자체가 선(仙)이요, 풍류’라는 옛말처럼 검덕과 예의절제 위에 비로소 바라게 되는 ‘무위(無爲)’가 동양 차문화의 중심이 아닐까. ‘놀이’가 그 본질이라는 동양의 차문화는 멋스럽고 그윽한 공간을 우리 앞에 펼쳐준다. 또 차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도기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편 유럽의 차문화를 풀기 위한 핵심 단어는 ‘사교’다. 거리의 한복판에 활짝 열린 카페는 자유로운 담론과 사교의 장. 카페를 들여다보면 담론하는 사교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유럽이 보인다. 이러한 담소의 공간을 제공한 것은 커피였다는 것. 차와 커피의 등장이 유럽의 문화를 한층 교양있게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동서양을 아우르며 저자는 방대한 차 관련 문헌을 풍성하게 정리하고 있다. ‘실용적’이기 보다는 ‘학술적’ 접근 방법으로 차와 관련된 단어의 기원, 차의 등급, 맛있는 차 만드는 법 등을 서술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한국의 차 이야기’는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는 점. 그로서는 차 맛과 같은 ‘여백’을 남겨둔 셈이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