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 경제부 차장
한국의 재계는 지금 ‘신(新)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외환위기 후 두드러졌던 ‘감량경영’에서 벗어나 기업인수나 신규진출 등 ‘몸집 불리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통신 유통 자동차 금융분야 등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삼성 LG SK 등 3대 그룹은 KT(옛 한국통신) 민영화를 위한 정부 보유 지분 매각과정에서 힘겨루기가 치열했다.
SK는 잠재적 경쟁자인 삼성의 통신사업 진출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연막작전과 ‘말 뒤집기’도 서슴지 않았다. 삼성투신 등 금융계열사를 통한 KT 지분 매입전략이 실패로 끝난 삼성은 SK에 대한 공세에 나서면서 다음 기회를 벼르고 있다. LG는 KT에 어느 정도 발언권을 확보한 데 이어 파워콤 민영화 입찰에 총력을 기울여 SK의 독주를 막겠다는 자세다.
유통분야도 ‘전운(戰雲)’이 감돈다.
롯데는 법정관리 중인 미도파백화점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권을 따냈고 국내 최대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인 TGI프라이데이도 인수했다. 또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석유화학 카드 소주업계로의 신규진출도 검토 중이다.
이에 맞서 현대백화점도 경기 부천에 건설 중인 시티백화점을 인수하는 등 유통업계 양대 라이벌간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가 압도적 우위를 지켜온 자동차시장은 프랑스 르노의 삼성차 인수에 이어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대우차 인수로 국내외 업체간에 한판승부가 예상된다. 현대·기아차는 국내 시장 방어 노력과 함께 미국 중국 등 해외진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 밖에 LG카드와 삼성카드를 축으로 한 카드업계의 불꽃 튀는 경쟁이나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 및 생명보험사의 민영화를 겨냥한 기업들의 물밑싸움도 눈에 띈다.
각 기업이 나름대로의 경영전략에 따라 선택한 이런 일련의 확장 움직임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하물며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운운하는 구태의연한 매도는 경계해야 한다.
다만 각 기업은 새로운 투자에 대해 경제적 효율성을 사전에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과거처럼 면밀한 조사 없이 ‘다른 그룹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이나, 총수 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턱대고 대규모 투자를 할 경우 우선 시장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당국도 개별기업의 투자 여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되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주지 않는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이를 지켜야 한다. 또 기업의 결정과정에서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엄격히 제재해야 한다.
개인의 주식투자에서도 첫번째 원칙은 ‘자기 책임’이다. 더구나 경제의 핵심주체인 기업의 의사결정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