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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친일은 없다' 발언으로 논란 일으킨 복거일씨

입력 | 2002-06-03 18:36:00


‘이 땅에 진정한 친일파는 없다’는 발언(본보 5월29일자 A15)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복거일씨(56)를 최근 서울 수색 집에서 만났다. 마침, 얼마 전 ‘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자유기업원·개정 증보판)이라는 책까지 낸 터여서 인간의 욕망과 체제의 화합을 고민하는, 한 자유주의자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했다.

-‘친일은 없다’는 발언 이후 주변 반응은 어떤가.

“동의하는 사람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흔히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 부수는, 생각의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을 푸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시류에 맞지 않는 발언으로 파열음을 낸다 (웃음). 이번 논문에서는 과거를 변명하거나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라, 친일파 단죄가 지금 이 시점에서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좀, 미래 지향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요즘, 사상적 편가르기가 심한데….

“원치 않는 소모적인 논쟁에 휩쓸리곤 할 때 좀 피곤하다. 난 노론이 아닌 소론적 에너지를 가졌다. 직장생활할 때도 독립 연대장이었다 (웃음). 주류였지만, 그 안에서도 늘 직언하고 비판해 아웃 사이더였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은 광야에서 외치지도 못하고 혼자 속닥거리는 건데….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지식인에겐 그게 편하다. 애초에 소설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남들의 비난에는 익숙하다.” (그는 요즘 환멸과 재미를 함께 느낀다고 말했다.)

“나더러 재벌과 독재를 옹호하는 ‘보수’라고 하는데 나는 부수고 허무는 사람들보다 세우고 보태는 사람에게 더 점수를 주는 편이다. 일제 식민지에 전쟁까지 거치면서 다 거덜났었다. 이 정도 발전은 세계 최고다. 소중하게 여기고 인정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두 단어는 가치 중립적이 아니다. 진보는 발전이나 개혁같은 긍정적 뉘앙스를 포함한 단어고 보수는 그 반대다. 그래서, 어떤 세력이나 이념에 대해 진보라고 이름 붙이면 우선 유리하다. 보수는 불리하다. 서구에서는 좌파 우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한 20여년전부터 좌파, 우파가 갑자기 진보, 보수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 고지를 선점해 버렸다. 진보라고 하면 사상이 어떻든간에 뭔가 발전적인 것 같고, 보수라고 하면 아무리 개방적인 사상을 가졌다 하더라도 기득권을 지키는 수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보 세력은 진보가 아니라는 말인가.

“오늘날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맑시즘의 기본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끼친 영향은 그 정도로 대단하다. 좌파는 기본적으로 맑시즘을 사상적 토대로 하고 있다. 그것은 200여년전 아담스미스 경제학이 뿌리다. 아담스미스 경제학이라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거다. 당시에는 수요 공급이란 말이 없었다. 시장을 움직이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잘 돌아 가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한 거다. 사회주의는 18세기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을 토대로 한 거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21세기 이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른바, 진보라고 하는 사회주의는 보호무역 해야지, 규제 해야지, 더 폐쇄적이다. 과연 누가 진보냐? 우리나라 좌파들은 스스로를 진보라 하고 반대편을 보수라 하면서 도덕적인 면을 선점해 자기들이 낡은 이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있다.”

-왜 진보세력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게 됐나?

“군사정권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정권 같은 전제 정권도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보답이 적은 일이다. 바로 여기에 지식인들의 고민이 있었다. 재벌 문제도 마찬가지다. 재벌없이 우리가 이 정도 성장을 할 수 있었겠느냐, 선단경영 체제가 아니었으면 외국에서 그 큰 수주들을 어떻게 해 왔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벌옹호자로 낙인 찍힌다. 그 바람에 재벌은 사회적 악한이 됐고 독재 정권이 국민들 비난을 받으니까 자유주의자들도 함께 도덕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반면에 좌파들은 독재에 싸웠다고 하는 것 때문에 좋게 비친거고.”

-맑시즘과 자유주의 역사관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맑시즘은 어떤 목표를 향해 역사가 나아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는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발전보다는 ‘진화’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진화는 정해진 틀이나 목표가 없다. 큰 추세는 있다. 예를 들면, 생물은 대뇌의 발전방향으로, 즉 정보처리를 더 효율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회적인 차원에선 인간의 자유가 더 늘어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아무리 현대 문명이 인간성을 억압하느니 어쩐다 해도 욕망의 폭과 깊이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욕망의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어느 사회나 불평등은 있다. 사회주의는 더하다. 더구나 사람마다 능력과 운이 다르다. 운명 공동체라는 부부도 길을 가다 벼락 맞아 아내는 죽고 남편은 보상금타서 새 장가 가는게 인생사다 (웃음). 경제학자들이 이미 불평등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개발해 놓았다. 정치인들이 몰라서 못 쓰는 거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여건이 꽃 피울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시민사회 경험이 없었다. 중국이 과학 문명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상업의 발달이 부족했다. 상업은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활동이다. 이것 저것 떠나서, 무엇보다, 대화와 토론이 안되는 게 가장 아쉽다. ‘전두환 정권도 잘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말만 떼 내어 나더러 ‘민주주의자냐?”고 되묻는다. 이래 갖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지식인들이 다 대학으로만 가려고 하는거다. 여기에 학연 지연이 얽혀 근친상간까지 나오고 있다. 새로운 담론을 일으킬 사람이 없다. 대학교수되면 좌파학생들 등쌀 때문에 둥글둥글 좌파가 돼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못 배긴다.”

-애국자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다 애국자다. 다 민족주의자다. 나라 팔아먹은 사람도 애국한다고 하면서 한거다. 이완용씨는 당대의 문장가였고 독립협회 고문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이완용씨가 왜 입장을 바꿨을까?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애국이란 것을 논의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우습다. 애국심이란 악한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말도 있다.”

-선생은 생존을 선(善)으로 보는 것 같은데….

“당연하지. 인간도 동물인데. 나는 소설에서도 주인공 죽이는 스토리는 맘에 안 든다. 내 주인공은 죽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소설가로 대성(大成)을 못 하지. 위대한 소설가는 주인공을 죽여야 하는데 말이다 (웃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