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가 3일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집권 후 개헌문제의 공론화를 제기하고 나서자 정치권은 사뭇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개헌공론화 발언이 예상외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이 후보측은 “개헌문제에 대한 이 후보의 기본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다”며 일단 수습하는 자세를 취했다. ‘집권하면 개헌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당 국가혁신위 건의(5월17일)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일단 현행 헌법대로 대선을 치른 뒤 필요하면 개헌문제를 논의한다는 원칙 이외에 정해진 것은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 후보가 자기 입으로 직접 개헌문제의 공론화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정치권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실제 이 후보측은 국가혁신위 종합보고서 발표 때도 “혁신위 안은 이 후보의 대선 공약과 엄연히 다르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또 이 후보는 올 들어 개헌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부정적 반응으로 일관해왔다. 이 후보는 지난달 23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초청 정책토론회에서도 “선거 시기를 맞추거나 대통령 중임제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개헌하자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개헌논의의 부적절성을 주장해왔다.
그런 이 후보가 개헌 논의의 장(場)을 ‘열어두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다분히 6·13 지방선거 이후의 대선 정국을 염두에 둔 정치적 포석이라고 당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지방선거가 끝나면 정계개편 논의가 시작될 것이고, 그 발화점(發火點)은 개헌문제가 될 공산이 큰 만큼 일단 공론화의 필요성은 받아들이되 시기는 ‘대선 이후’로 분명히 못박아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전면적인 개헌 논의의 시점을 ‘집권 후’로 못박은 것은 연말 대선과 개헌 논의의 분리대응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라며 “이를 통해 지방선거 이후 각종 개헌론을 고리로 터져나올 정계개편 음모를 막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당체제의 대선구도를 조성하려는 전략이다”고 풀이했다.
여기엔 또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와의 지지율 격차가 무시할 수 있는 범위로 좁혀졌다는 자신감도 깔려있다는 게 당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개헌문제가 한나라당의 판단 이상으로 연말 대선 정국을 달구게 될 경우 이 후보측이 국면 반전을 위해 보다 진전된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좀 더 지켜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이낙연(李洛淵) 기획조정위원장은 “이 후보의 발언은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한 원론적인 수준에 그쳐 특별히 가타부타할 대상은 아니다”고 말했고, 자민련 유운영(柳云永) 대변인직무대리는 “개헌논의 공론화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개헌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이회창 후보의 개헌관련 발언록▽2002.1.2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
5년 단임제나 4년중임제나 모두 장단점이 있다. 정말로 개헌하고자 할 때는 신중하게 국민의사를 물어야 한다. 이런 시기에 개헌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문제의 시급성에서조차 적절치 않다.▽2002.1.7 대한매일 인터뷰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략적으로 개헌문제를 가지고 합종연횡하거나,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2002.1.17 연두기자회견
월드컵과 선거 등 올해 현안이 산적해있는데 이를 제쳐놓고 헌법조항에 매달릴 수 없다.▽2002.4.11 한겨례신문 인터뷰
(집권하면 개헌 논의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대통령제 아래에서 대통령으로서 당장 할 일을 준비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2002.5.23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토론회
헌법은 될수록 고치지 않으면서 운영하는 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