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폴셰러국립연구소가 개발한 양성자 암치료장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많은 과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 뒤 입자 가속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가속한 양성자로 원자핵을 파괴해 쿼크 등 물질의 궁극 입자를 찾아냈다. 양성자는 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이루는 입자로, 전자보다 1840배 무겁고 + 전기를 띠고 있어 전자석으로 가속할 수 있다.
이 가속기가 암 치료에 새 희망을 주고 있다. 양성자 가속기를 암 치료에 쓸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이 1946년에 내놓았다. 하지만 기술이 어려워 실현되지 못하다가 90년 미국 로마린다대 메디컬센터가 암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양성자 치료 시설을 보유한 곳은 하버드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 일본 국립암센터 등 11개국 19곳으로 늘어났고 2만7000여명의 암 환자 등을 치료했다. 우리나라도 국립암센터가 이달 중 장비 입찰을 해 2005년 양성자 치료센터를 완공한다. 지하4층, 지상1층의 이 센터는 전체 건설비가 480억원이나 되는 초대형 시설이다.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 위치한 양성자 가속기 제조 전문업체 IBA사를 방문했을 때 이곳 연구진들은 중국이 발주한 2개의 양성자 암치료장치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이 치료장치의 핵심은 진공의 원형 전자석 속에서 +전기를 띈 양성자들을 가속시켜 양성자 빔을 만들어내는 사이클로트론이다.
이 회사 이반 라테니스트 부회장은 “기존의 방사선 치료 방법은 방사선을 쪼이는 과정에서 암 세포 뿐 아니라 근처의 정상 세포까지 손상을 줘 방사선을 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성자는 X선과 달리 몸 속 수십㎝ 깊은 곳에 도달해서야 파괴 에너지의 대부분을 잃게 되므로 건강한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고 암 조직만을 정조준해서 파괴할 수 있다”며 “특히 양성자 빔의 에너지를 조절하면 파괴할 조직의 깊이도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양성자 치료는 전통적 방사선 요법으로 치료하는 기존의 암에 모두 적용할 수 있으며, 특히 몸 속 깊은 곳에 있어 기존의 방법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눈암, 뇌종양, 전립선암과 어린이의 암을 치료하는 데 적합하다”고 밝혔다.
취리히 근교의 리마트 강변에 위치한 스위스 최대의 국립연구소인 폴셰러연구소는 9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양성자 암 치료를 시작한 곳이다. 이 연구소는 그동안 3000여건의 눈암을 90% 이상의 성공률로 치료했고, 몸 속 깊은 곳에 암이 생긴 환자도 99명을 치료했다.
이 연구소 에로스 페드로니 박사는 온 몸을 CT로 스캐닝해서 암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이 자료를 치료장치에 넣어 1㎜의 오차로 환자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양성자 치료장치를 개발했다. 페드로니 박사는 “우리가 개발한 장치는 자석으로 양성자 빔(지름 5∼7㎜)을 자유자재로 휘게 할 수 있고, 신체를 9000개 이상으로 나누어 조사선량을 각 부위 별로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성자가속기는 수십 나노미터까지 물질의 미세 구조를 파악하는 데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암 치료 뿐 아니라 최근에는 나노테크놀로지, 단백질 구조 규명, 첨단반도체 개발, 재료공학 등 첨단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부가 2011년까지 1280억원을 들여 길이 100m의 선형 양성자가속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 사업을 맡은 원자력연구소 최병호 양성자기술개발사업단장은 “미국의 방사선이용산업은 발전 대 비발전의 비율이 20대80, 일본은 46대54이지만 한국은 90대10으로 의료 등 비발전 분야의 매출 비중이 매우 낮다”며 “양성자 가속기의 건설이 선진형 원자력산업구조로 개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브뤼셀·취리히〓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