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근
“문밖으로는 가을빛이 정히 좋은데/소맷자락 잡고 나서자니 오히려 가련하구나/정다운 삼봉의 빛은/어언 다섯 해 전인데/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있고/붉은 잎은 수풀에 물들어 곱네/동서로 떠돈 것이 벌써 오래됐는데/산 속은 저녁안개에 잠겨있네.”(‘가을날 과지초당에 거듭 오다·秋日重到瓜地草堂’에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처연하면서도 편안한 추사의 만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최근 펴낸 책 ‘완당평전 2’에서 “불교적 의미로 마음을 비움”이라고 표현했다. 추사는 과천에 머물면서 수많은 글씨를 남겼다. “비로소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며 과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추사에게 과천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휴식처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경기 과천시 주암동, 경마장 뒤쪽이 ‘과지초당’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추사의 숨소리만 묻어 있을 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선비이자 서예가인 추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과지초당’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한 시대를 살다간 거장의 자취를 복원하는 일은 문화적 가치를 되살리는 일이며, 후손에게 역사적 의미를 심어주는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과천시 주암동 일대 20여만평의 부지에 사령부 건물을 짓겠다고 발표하자 과천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이달 중 사업고시를 하고 내년 중 공사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추사가 만년을 보낸 ‘과지초당’이 있던 자리가 바로 그 옆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반민주성의 표상이었고, 최근까지도 시민단체의 활동을 좌익세력으로 몰았던 기무사가 추사의 자취가 묻은 자리로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복원의 목소리가 높은 마당에 20만평을 개발한다는 계획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뿐이 아니다. 청계산은 서울의 관문이자 수도권의 허파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다. 특히 기무사가 밝힌 신축 부지는 자연녹지도가 6∼8등급에 이르는 생태계 보호 지역이기도 하다. 무분별한 난개발과 그린벨트 해제로 가뜩이나 청계산이 신음하고 있던 터에 기무사의 과천 이전 발표는 일종의 충격이다. 자연은 더 이상 개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가치가 생태적 가치에 우선하는 시대는 지났다. 더구나 문화적 가치가 배어 있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4월23일, 시민들은 또 한번 좌절했다. 기무사 관계자들은 기무사 과천 이전을 설명하기 위해 과천 시민단체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미 국가정책 차원에서 결정됐고,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면서 “과천시민이 반대해도 기무사는 온다”며 일방적인 강경 입장을 전달했다. 시민들의 반대와는 무관하게 기무사 이전을 추진할 태세다.
이를 지켜본 많은 시민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기무사가 권력을 이용해 또다시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김동근 과천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