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다. 어떤 광고 카피의 인기는 그 카피를 패러디한 카피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학교 주변에는 “열심히 공부한 당신, 놀아라!”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지친 피부, 휴가를 떠나라!”라는 광고도 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당신, 멈춰서라!”라는 기사 제목도 나왔다.
▼명령조 길거리 표어는 공해▼
직업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도 빛은 별로 나지 않고, 그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피해의식을 약간씩은 가진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과 간판에서 “당신은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제 마음놓고 떠나라”고 호쾌하게 ‘허락’한다. 그것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해준다. 얼마나 반가운 이야긴가. 이처럼 나를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말이 또 어디 있나. 아마도 이런 사회적인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했기에 이 카피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잘 만든 광고 카피는 사회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그냥 툭 던지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마음 속 깊이 화살 하나를 꽂아놓고 간다.
수사학의 세 가지 목표는 가르치고, 즐겁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목표는 따로따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그 말에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을 투영시켜서 체화시킬 수 있을 때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된다. 주어진 메시지에 대해서 수용자가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직접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 ‘설득’의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연상작용’을 통해서 수용자가 가진 좋은 경험이나 느낌을 메시지에 연결시키도록 만들어야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된다. 구호나 메시지가 남겨놓은 여백을 개인의 감성과 경험으로 채울 수 있어야 마음에 남는다.
잘 만든 카피를 볼 때마다 길거리나 육교, 현수막에 붙어있는 표어도 좀 더 잘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붙어있는 표어들은 너무도 관공서 작품답다. 직설적이고 명령조다. 사람들을 기필코 계도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관의 의지가 배어 있다.
“운전 전에 안전벨트, 운전 후엔 양심벨트.” 이 정도면 점잖은 편이다. 복잡한 네거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큰 돌에 “바르게 살자”라고 엄중하게 쓰여 있다. 길 중앙에 커다란 돌에다가 “우리는 봉사한다”라고 써놓은 것도 있다. 봉사는 그저 조용히 하면 되는 것이지, 길을 막고 “우리는 봉사한다”고 근엄하게 선언해야 봉사가 제대로 되는 것일까. “호국정신 이어받아 나라사랑 앞장서자”는 식의 표어는 너무 상투적이지 않나. 관공서 표어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로는 옛날에 자주 볼 수 있었던 “간첩 잡아 충성하고 상금 타서 효도하자”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과격한 표어는 이제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글자 수만 여덟 자씩 맞추면 된다고 여기는 듯한 표어가 많다.
거리의 표어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을 써서 알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좀 더 가슴에 와 닿게 할 수는 없을까.
마음이 없이는 다른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논리에도 맞지 않고 감성에도 호소하지 못 하는 표어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별로 효과가 없다. 어떤 때는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물론 길거리 표어를 이윤 창출을 목표로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광고 카피처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의 공간을 사용해서, 시각적으로도 안 볼 수 없는 자리에 표어를 붙이는 일이라면 좀 더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따뜻하고 재치있게 바꾸자▼
월드컵을 맞아서 서울 시내의 거리는 참 아름다워졌다. 서울 세종로 거리를 환상적으로 수놓는 은은한 불빛과 조명, 그 많은 꽃들이 그 전에는 어디에 다 있었을까 싶게 곳곳에 꽃으로 장식한 거리, 월드컵 전에도 좀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싶을 만큼 정성을 들여서 정비한 길거리 조경,밤의 한강 다리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조명 장식, 한강의 불꽃…. 그런 정성과 노력으로 거리에 붙여놓은 표어도 한번 재정비하면 어떨까. 국민교육헌장 투로 국민을 계도하겠다는 관공서 대표선수 같은 표어 말고, 따뜻하고 재치 있는 표어를 내걸면 서울 시내 환경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 같다. “내가 마음을 열면 우리 모두가 하나됩니다.” 제2의 건국을 내세우면서 내건 이 뜻밖의 표어 같은 표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강미은 숙명여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