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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기업의 얼굴’ 社屋이 변한다

입력 | 2002-06-09 20:28:00


《도시 풍경의 한 주인공인 기업의 사옥들.

성장시대엔 무조건 크고 높은 ‘성(城)’이 되려고만 했던 그 사옥들이 이제 다채로운 얼굴로 거리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회색빛 무심한 정물(靜物)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상징이자 시민들을 보듬는 ‘마당’의 역할을 하고 나섰다.

건축가 서현 교수(한양대)는 “70, 80년대 기업 사옥들이 자본 축적의 표현이었다면 이제는 문화적 공공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대기업 사옥들은 겉으로 보면 ‘철옹성’이다. 보안이 강조되면서 입구에서부터 경비요원과 식별(ID)카드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닫힌 공간이다.

그러나 사옥은 한편으론 그 자체가 기업의 이미지를 전하는 거대한 광고판 역할을 한다. 여기에 사옥의 딜레마가 있다. 닫힌 울타리이면서도 소비자에게 열린 광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닫힘과 열림의 공존〓서울 중구 태평로의 삼성 타운은 그 같은 ‘닫힘과 열림의 공존’을 보여준다. 삼성 사옥들의 색조는 청색 위주여서 차가운 이미지를 풍긴다. 그 안은 보안체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그룹답게 긴장감이 팽팽하다.

그 총합은 ‘닫힌 삼성’의 이미지로 모아진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주변공간을 통해 상쇄, 보완된다. 삼성생명 빌딩 옆에 들어선 로댕갤러리는 폐쇄공간과 밖의 거리를 잇는 중간지대 역할을 한다.

‘혼탁한 도심 속 일상에서 벗어나 로댕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 휴식 공간’을 지향한다는 건축 의도 그대로 이곳은 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한 ‘창’이 되고 있다.

‘공공에 할애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공간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생명 사옥 앞. 이곳은 교보빌딩의 정원이자 시민들의 작은 공원 역할을 한다. 법적으론 교보의 소유로 돼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실질적으론 시민들의 공간이다.

을지로 입구 일은증권의 1층 부분과 ‘하늘공원’도 ‘공공화된 사유공간’이다. 이 건물에서 1층은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터로 개방됐다. 건물 중간의 ‘하늘 공원’도 시민에게 제공된 공간이다.

▽유리를 통해 비치는 기업의 투명성〓한국 기업들의 화두 중 하나는 ‘투명성’. 이는 이사회 운영의 개선이나 회계의 투명성 제고와 함께 사옥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사옥의 투명성은 유리를 통해 적극 표출되고 있다.

“건물은 철강을 통해 높이를, 유리를 통해 그 투명성을 얻었다”(제임스 트레필 저 ‘도시의 과학자들’ 중에서)는 말처럼 유리라는 소재는 한국 기업들의 변화와 만나 기업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폐쇄적 공기업 이미지가 강했던 포스코(옛 포항제철)가 부정적 이미지를 많이 씻어낸 데는 투명성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사옥에 힘입은 바 크다. ‘개방적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외관과 로비에서 꽉 닫힌 철강 공기업의 이미지는 느낄 수 없다. 건물엔 벽이 모두 유리로 돼 있어 굳이 창을 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입구도 엘리베이터도 천장도 모두 유리로 돼 있다. 그만큼 투명한 공간을 지향한다. 투명함과 함께 로비에는 철강 갤러리 등이 꾸며져 누구나 자유롭게 쉬어갈 수 있어 행인이나 방문객들을 위한 ‘마당’의 역할도 한다. “도시에 활기를 가져다 주는 촉매 역할을 기대했다”는 설계자(한양대 원정수 교수)의 말처럼 이 건물은 강남 테헤란로의 명물이 되었으며 건축학도들 사이에서도 견학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 종로의 SK그룹 사옥이나 강남의 동부그룹 금융센터 빌딩 등도 모두 콘크리트 벽을 최소화하거나 거의 없애고 유리로 벽을 삼은 빌딩들이다.

▽기업 이미지의 상징〓LG그룹은 중국 베이징(北京)에 짓는 건물을 서울 여의도 본사 사옥처럼 쌍둥이 빌딩으로 세우기로 했다. 쌍둥이(트윈스)라는 이미지는 그룹 소유의 야구단(LG트윈스)에도 반영되어 사옥의 이미지가 그룹의 이미지로 연결된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사옥을 기업 이미지에 활용하는 경우가 미국 실리콘밸리 등의 정보기술(IT)기업들이다. 미국 시애틀의 마이크로소프트(MS) 본사 사옥은 ‘캠퍼스’로 불린다. 대학 캠퍼스처럼 늘어서 있어 연구소 같은 분위기가 이 회사의 첨단 연구 이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강해서 숨어 있는 기업들〓반면 제대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단촐한 사옥을 고집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한 남양유업은 자체 사옥이 없으며 태광산업은 우량기업의 사세에 걸맞지 않게 사옥이 소박하다.

생산 차종의 하나가 세계화의 상징(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으로 쓰일 만큼 글로벌 기업인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창업지인 나고야 옆 지방도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오히려 사옥의 검소한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강한 기업의 인상을 준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