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축구가 온 국민을 열광시키고 하나로 묶어내고 있듯이 2년 전 오늘 우리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에 환호했으며 이를 계기로 분단과 냉전으로 고통받아온 한민족이 평화 민족으로 거듭날 것임을 기약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남북관계는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도 대결과 반목을 주조로 하던 남북관계가 화해와 공존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이 현격하게 완화되었고 이것이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로 이어져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극복해 가는 한국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남북대화와 민간협력도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적으로 증가했고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합의사항 실천 지연 실망▼
물론 남북관계는 하루아침에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당장 커다란 성과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긍정적 평가가 못마땅할 수 있다. 하기야 당장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는 섭씨 100도의 끓는 물이 필요할 뿐이며 그보다 낮은 온도의 물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물은 0도에서 데워져 비등점까지 이른다. 즉 물이 끓기 위해서는 뜨거워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의 남북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남북관계의 수온은 1972년 7·4 공동성명을 계기로 얼음장같은 빙점(氷點)을 뚫고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해 지금은 40∼50도 정도는 된다고 보며 이 중 20∼30도는 지난 2년간 상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늘 40도의 물에서 목욕하던 사람에게 35도의 물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처럼 일단 발전된 남북관계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조금만 남북관계가 삐걱거려도 불안해하고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과거보다 나아졌다 해도 현재는 현재의 수준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년간 빈번히 발생한 북측의 일방적인 회담 보류와 합의사항의 실천 지연은 화해협력을 소망하는 국민과 세계인들을 실망시켰다. 이는 여전히 남북 간의 신뢰체계 형성이 미흡하며 그로 인해 남북관계가 불안정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협추진위원회 회의가 일방적으로 무산되고, 경의선을 연결하기로 몇 번씩이나 합의해놓고도 첫 삽조차 뜨지 못했으며 곧 이루어질 것 같던 이산가족면회소의 설치가 지연되는 상황에 대해서 국민은 답답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답답증은 북한지도부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서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위와 정책 실행능력에 대해 갖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당국간 2차례를 포함해 4회에 걸쳐서 남측과 합의를 하거나 대남관계 개선과 관련한 획기적인 정책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이나 발언 중 지켜진 것보다는 불발로 그친 것이 훨씬 많다는 점 때문에 그의 유일적 권위를 의심하거나 정책 수행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필자가 평양이나 제3국에서 만난 북한인사들은 한결같이 “장군님은 결심하신 일을 반드시 실천하며 약속도 반드시 지키신다”고 으쓱하며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확언했다. 그러나 지금 북한 밖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가고 있다. 김 위원장의 약속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외부세계에서 그의 말은 곧 신뢰성을 상실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지도부는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南北 진지한 대화 재개해야▼
지금은 진지한 남북대화가 필요하며 합의사항을 이행하려는 당국간의 노력이 가시화되어야 할 때다. 상대방의 말실수나 해프닝을 문제삼아 수시로 대화를 중단시키는 협량한 태도도 고쳐야 한다. 필자가 남북대화의 빠른 복원을 요구하는 것은 당위적인 소망이나 혹은 남북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그럴듯한 주석을 하나 더 달기 위함이 아니다. 실제로 요즈음이 한반도 평화와 위기를 가름하는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2003년은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이행과 북한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분기점이 되는 해다. 그런데도 북한과 미국은 아직 대화 테이블에 앉지도 못한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북대화는 남북협력의 증진은 물론이거니와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대결국면을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또 그것만이 한반도 문제를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가는 자주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