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영남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함으로써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가 3월 당내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공약했던 ‘재신임’ 문제가 당내 핵심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만 보면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를 근소하게나마 앞섰던 노 후보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5일 여론조사전문기관인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체지지율에서 노 후보는 40.3%를 얻어 36.6%의 지지율을 기록한 한나라당 이 후보를 앞섰으나 지방선거 결과는 전혀 달랐다. 특히 서울 및 인천·경기지역에서도 노 후보는 서울 42.1%, 인천·경기 40.6%의 지지율로 각각 35.1%와 33.4%에 그친 이 후보를 앞섰으나 이번 선거에선 민주당이 이들 지역에서 완패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도 노 후보의 지지율은 32.3%였지만 민주당 한이헌(韓利憲) 부산시장후보와 김두관(金斗官) 경남지사후보의 지지율은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민주당 측은 노 후보의 지지도와 당 지지도 간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데다 노 후보의 지지기반인 젊은층의 투표참여가 저조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또한 한나라당이 내세운 ‘DJ 심판론’이 먹혀들면서 노 후보의 인기를 상쇄시켜버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노풍(盧風)’이 노 후보의 출신지인 부산에서조차 전혀 불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설명만으로는 미흡한 게 사실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노 후보의 안정감 부족이 일부 지지층에게조차 부정적으로 비치기 시작한 데다 지지부진한 ‘탈(脫) DJ’ 작업으로 영남지역에서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됐기 때문”이라며 ‘위기상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이제 다시 노풍의 재점화가 가능할 것인지는 재신임 방식과 당 개혁의 향방에 달려 있다는 것이 당내의 중론이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는 노 후보의 재신임 시기에 대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대세다. 어차피 재신임 절차를 거칠 바에야 그 시기를 늦춰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을 놓고는 아직 가닥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 김원길(金元吉) 사무총장은 700여명 규모의 중앙위원회 소집이나 전당대회 개최를 재신임의 방안으로 내놓았지만 한 중진의원은 “결과가 뻔한데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느냐. 100명 규모의 당무위원회나 300명 규모의 국회의원·원외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재신임 문제를 보는 각 정파의 시각도 다양하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나는 재신임이고 문책론이고 관심이 없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하고 선거도 끝나기 전에 패배를 자인한 당 지도부의 모습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또 이인제(李仁濟) 의원을 지지했던 한 의원은 “통과의례가 됐든, 어떤 형태로든 재신임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재신임 자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한 중진의원은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를 대비시키면 노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굳이 재신임 절차를 밟아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노 후보의 재신임 문제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수도 있지만 당 지도부 인책론과 맞물릴 경우 민주당에 분란의 불씨를 던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