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에서 26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제 14 회 국제 고서 시장’은 파리 시민들에게 평소 쉽게 접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고서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번 고서 시장에는 29 개 나라에서 200여 고서적 서점들이 참가해 2만5천 권의 희귀한 고서적들과 유명 작가들의 자필원고, 판화 등을 선보였다.
유럽에서 ‘고서’라 함은 일반적으로 ‘인쇄술의 발명’과 ‘종이의 사용’으로 오늘날의 ‘책’ 모양을 띠기 시작한 15세기 이후의 책들을 일컫는다. 좁게는 책 제조방식이 산업화되지 않았던 18 세기까지의 책들만을 ‘고서’의 범위에 넣지만, 그 이후의 책들도 신간 서적을 판매하는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면, 모두 ‘고서’ 목록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책 사냥꾼들’의 관심은 19세기를 너머 20세기 전반에 출간된 책들에까지 미친다.
‘고서’는 헌책이기는 하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그 희소성과 역사적 가치로 인해 상품가치가 무척 높아진 책들이다. 따라서 브로캉트(마을 벼룩시장)나 헌책방에서 헐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중고 서적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벼운 마음으로 강변을 거닐면서 ‘고서’를 구경하려면, 센 강변의 명물인 부키느리(고서적 판매대)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전문적인 수집상이나 고서적 애호가라면 이번 ‘고서 시장’과 같은 특별 행사를 이용하거나, 전문 고서점을 직접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파리의 고서점들은 한 곳에 모여있지 않기 때문에, ‘책 사냥꾼’들은 좋은 ‘물건’을 건지려면 이리저리 발품을 팔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파리의 고서점은 19세기 초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고서점 수가 오히려 일반 서점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책 출판이 여의치 않은 사정 때문이었으리라.
18세기 이전에 나온 ‘고서’의 외형적 특징은 책표지 전체를 ‘가죽’으로 입혀 고급스럽게 장정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1820년을 전후해서 나온 책들은 ‘책등’에만 가죽을 입히고 책의 앞뒤 표지를 두꺼운 골판지에 ‘천’으로 덮는 ‘반 가죽’ 제본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이후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책 제본은 더욱 간결해졌고, 오늘날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종이표지판’이 대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처럼 ‘책의 민주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오늘날의 책들은 전통적인 ‘고서’들처럼 ‘호화로운 겉옷’을 걸칠 수 없게 되었다.
테오필 고티에의 주석이 달린 보들레르의 ‘악의 꽃(1894년)’이 380 유로,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1832년)’가 120 유로, 에밀 졸라의 마지막 책인 ‘파스칼 박사(1893년)’가 150 유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프랑스 작가들의 19세기 판본이 이 정도 가격이라면 전문적인 ‘책 사냥꾼’이 아닌 ‘책 애호가’들도 부담 없이 눈독을 들일만한 ‘고서’들이 아닐까?
임준서 프랑스 LADL 자연어 처리연구소 연구원 joonseo@worldonline.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