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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젊은 오빠’ 은행장들 “은행문화 바꿔,바꿔”

입력 | 2002-06-17 17:30:00



14명의 은행장이 참석한 가운데 11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협의회. 이날 7명의 은행장은 혼자 걸어서 한은에 왔다. 2, 3년 전만 해도 은행장들은 으레 승용차를 이용했다. 한은 바로 맞은편에 있던 옛 상업은행도 마찬가지였다.

40대 은행장이 등장하면서 ‘보수성’의 상징이던 은행들이 변신하고 있다. 요즘 은행들은 스스로를 ‘금융기관’ 대신 ‘금융회사’라고 부른다. 수익을 좇는 조직이라는 의미에서다. 은행장들은 수익성을 위해서라면 행정기관과도 거리낌없이 신경전을 벌인다. 은행장이 거래기업을 찾아 대출세일을 펼치는 모습은 별로 새롭지도 않다.

▼행정기관 요구도 거절▼

▽장사꾼을 자처한다〓한미은행의 한 부서장이 새로 추진할 사업을 설명하기 위해 하영구(河永求) 행장을 찾았다. 씨티은행 출신으로 실용적인 스타일인 하 행장은 대뜸 “그 사업하면 얼마나 벌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자 “수익성 검토가 끝나면 다시 보고하라”며 돌려보냈다.

서울시가 ‘지방세 체납자의 금융자산 상태를 알려달라’고 하자 조흥 서울은행 등은 “정보제공 사실을 고객에게 통보하는데 드는 비용을 서울시가 부담하라”며 이를 거부했다.

김정태(金正泰) 국민은행장은 급증하는 가계대출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가계대출 비중을 줄여 달라는 당국의 요구에 “국민은행은 기업금융보다 소매금융에 경쟁력이 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아가 서민금융기관이라는 인식을 벗고 상대적으로 수익이 많이 나는 프라이빗뱅킹(PB)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며 PB 사업부를 떼어 내 별도 법인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강정원(姜正元) 서울은행장은 우량고객이 많은 지점 15곳에 자산관리사 금융상담사 등의 자격증을 가진 직원을 배치해 자산운용은 물론 세무 부동산 보험 등 재테크 관련 컨설팅을 하도록 했다.

이덕훈(李德勳) 우리은행장은 서류보관, 카드발급 등의 업무 때문에 영업점 직원이 수익사업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이 같은 업무를 본점에서 모아 처리하도록 했다.

▽권위주의가 사라진다〓홍석주(洪錫柱) 조흥은행장은 취임 후 바로 수행비서를 없애고 은행장실을 미니회의실로 개조했다. 지난달 출장에서 돌아와 결재하려고 오후 11시반 집에서 사내통신망에 접속했다가 이용자 목록을 보고 야근자와 채팅을 했다. 직원에게 야근 이유를 묻고 “늦게까지 일해주니 고맙다. 하지만 몸도 챙기면서 일하라”고 격려했다. 모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 우수직원의 부부를 초청해 영화 감상을 하기도 했다.

강정원 행장도 취임 직후 수행비서를 없애고 사무실 크기를 절반 정도 줄였다. 은행장과 임원의 방에 있던 소파를 들어내고 회의용 테이블로 바꿨다. 이른바 ‘눈치보기’ 관행을 깨기 위해 재실등도 없앴다.

하영구 행장도 지난해 5월 비서실을 없애고 행장실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 직원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e메일로 축하메시지를 보내준다. 자신이 직접 회의자료를 만들고 자주 찾는 구내식당에서도 차례를 기다려 배식을 받는다. 영업점에 갈 때는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다.

▼전용 엘리베이터 없애▼

이강원(李康源) 외환은행장은 4월 말에 취임한 뒤 은행장 전용엘리베이터를 없앴다. 은행장에게 결재를 받을 때 셔츠차림으로 오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김정태 행장은 월드컵 한미전이 열린 10일 서울시청 앞에 운집한 10만 인파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부채를 나눠주었다. 어린이용 신상품을 팔기 위해 직접 우스꽝스러운 캥거루 복장을 하고 판촉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김정태 행장은 앞으로 능력과 실적 위주의 인사를 하겠다며 인사기록카드를 아예 없애버렸다. “외부에서 인사 청탁을 하면 명단을 공개하고 별도 관리하겠다”고 선언한 뒤 인사권을 본부장에게 넘겨주었다. 3월 인사 때에는 대리 및 과장급 60명을 지점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신임 지점장 중에는 여성 31명이 포함돼 있었다.

▼임직원 스톡옵션 확대▼

홍석주 행장은 은행업 성패가 사람에 달려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연수원을 인재원으로 개칭해 행장 직속으로 배치하고 직원 연수비용도 종전의 3배인 연간 120억원으로 늘렸다. 경영진 후계그룹을 양성하는 체제를 마련하는 한편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직원을 6개월가량 제휴 외국은행에서 근무하게 하는 인턴십프로그램도 도입했다. 겸업화에 대비해 제휴를 맺은 KGI증권 직원들이 은행지점에서 주식에 대한 상담, 증권계좌 개설, 주식거래 등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영구 행장은 임원은 물론 직원에 대한 성과배분도 강조해 이익의 일정분을 직원에게 나눠주도록 스톡옵션을 강화했다.

강정원 행장은 빠른 일 처리를 위해 영업점의 차장제도를 폐지했다. 본점 부서장에게는 특정 사안에 대해 실무자 입장에서 직접 기안하고 실무자들과 협의해 즉석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김상철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