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6강 상대인 이탈리아와는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한국이 32년만의 본선 진출을 이룬 86년 멕시코월드컵이 그 무대.
당시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불가리아를 상대로 선전을 했고 조별리그 마지막 이탈리아전을 앞두고는 그 어느때보다 자신감을 불태웠다. 반면 이탈리아는 66년 잉글랜드월드컵때 북한에 패퇴한 악몽이 가시자 않아 한국전에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었다.
한국은 심판의 편파 판정 속에 2-3으로 졌지만 최순호와 내가 경기 종료 직전까지 2골을 뽑아내 유난히 이탈리아에 강한 한민족 축구의 저력을 보여줬다.
오늘 16강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객관적인 전력에선 우세하지만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홈팀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의 스피드와 기동력,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은 이탈리아가 감당하기에 다소 벅차다는 판단이다.
일단 경기는 백중세가 될 전망이다. 이탈리아는 수비를 두텁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경기를 풀어갈 것이다. 한국의 강한 압박과 빠른 공격을 빗장 수비로 막아내다 단 한번의 결정적인 역습으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작전이다. 한골만 따내면 다시 전원이 수비로 돌아서 경기 종료까지 골문을 단단히 잠그는게 이탈리아의 전통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계획은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다. 오랜기간 호흡을 맞춰온 수비라인의 칸나바로가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데다 네스타도 무릎 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하다. 대체 선수들은 경기 감각은 물론 경험과 노련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만큼 한국의 스피드는 위력을 더할 것이다.
이탈리아가 지리한 ‘지키기 축구’로 일관, 승패가 승부차기로 넘어가더라도 한국으로선 손해볼게 없다. 이탈리아는 94년 미국월드컵 결승전, 98년 프랑스월드컵 8강전에서 모두 승부차기 끝에 고개를 떨궜던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징크스’가 선수들의 가슴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다. 더군다나 우리 GK 이운재는 승부차기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듬직하다.
내가 상대했을때보다 이탈리아는 공수의 폭이 좁아졌고 미드필드 압박도 강해졌다. 이는 세계축구의 흐름에 따른 것일뿐 기본적인 경기 운영 스타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선배들은 아쉽게 졌지만 후배들이 자신감을 갖고 나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한다.
허정무 본보 자문위원·축구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