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 이 나라에는 평범한 일상이 아닌, 뭔가 ‘영화같은’ 사건이 곧 일어날 듯한 냄새가 짙게 풍긴다.
영화 ‘비포 나잇 폴스(Before Night Falls)’는 쿠바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삶을 다뤘다. 93년 뉴욕 타임스가 그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그의 동명 자서전이 원작이다.
이 작품에는 쿠바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처럼 혁명 사랑 음악 등 단골 메뉴가 등장하지만 뚜렷하게 구별되는 게 있다. 그것은 아레나스가 동성애자라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동성애라는 코드에서 접근한 쿠바와 쿠바혁명. 영화는 부패를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혁명이 다시 어떻게 부패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쿠바 정부의 입장에서 동성애는 혁명과 공존할 수 없는 대립항이었다. 실제 쿠바는 1980년 동성애자 정신병자 범죄자 등을 한데 쓸어모아 “이런 자들은 필요없다”며 국외로 추방한다. 거꾸로 동성애자에게 혁명은 지옥이었다.
영화는 쿠바의 소용돌이치는 현대사를 밑그림으로 아레나스의 어린 시절부터 90년 미국 뉴욕에서 가난과 에이즈로 죽을 때까지 동성애자로 살아온 삶을 담아냈다.
10대 시절 카스트로 혁명군에 참여하려고 가출할 만큼 성숙했던 아레나스(하비에르 바르뎀)은 20세 때 하바나대에 입학해 문학적 재능을 키운다. 혁명 초기 수도 하바나는 정치 사회 문화는 물론 성(性)에서도 변혁의 물결이 강하게 일렁인다. 아레나스는 이곳에서 작가와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하지만 혁명이 끝난 뒤 쿠바 정권은 비판적인 예술가와 동성애자들을 탄압한다. 성희롱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아레나스는 옥중에서 소설을 써 외부로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화가이자 감독인 줄리앙 슈나벨이 연출을 맡았다. 슈나벨은 96년 동료 화가인 장 미셀 바스키아의 일대기를 그린 ‘바스키아’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슈나벨은 자신의 재능과 아레나스의 시를 결합해 시와 회화가 공명하는 환상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 ‘하몽하몽’ ‘당신의 다리 사이’ ‘라이브 플래쉬’ 등에 출연한 바르뎀이 주인공 아레나스역을 맡아 내면의 울림이 있는 멋진 연기를 보여줬다. 극중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숀 펜과 조니 뎁 등 할리우드 톱스타의 모습을 찾는 재미도 있다.
아레나스의 삶을 충실하게 다룬 반면 극적인 재미가 떨어지는 점이 아쉽다. 2000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21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