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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설욕 다짐 유창혁 '헛손질' 연발

입력 | 2002-06-18 16:56:00


《유창혁 9단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분노 한탄 불안감 등이 섞인 묘한 웃음이었다. 장면도 흑 2가 놓여진 순간이었다. 최근 서울 성동구 홍익동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KTF배 결승 3번기 2국.》

배달왕전에서 이름이 바뀐 이 기전의 타이틀 보유자는 이세돌 3단. 2000년 타이틀 보유자였던 유 9단은 당시 32연승의 돌풍을 기록하는 등 욱일승천하던 이 3단을 맞아 2 대 3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로 인해 이 3단은 국내 기전 2관왕이 돼 한국기원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을 받을 수 있었다. 리턴매치를 벌이는 유 9단으로선 꼭 설욕하고 싶을 것이고 이미 1국에서 승리를 거뒀다.

초반부터 백을 든 유 9단에게 유리한 흐름. 유 9단은 유연하고 두터운 수법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 3단의 날카로운 수를 잘 막고 있었다. 흑이 덤을 내기 힘들 것 같은 형세.

상변 패의 대가로 좌상변 백을 내주었지만 백은 우상변 흑을 공격하며 이득을 얻으면 충분한 형세다. 언뜻 좌상변이 실리상 커보였지만 백의 판단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백이 1로 밀자 이제 흑은 우상변 흑말을 살릴 차례. 하지만 배포 두둑한 승부사 이 3단은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식으로 중앙 흑 2로 오히려 백의 굴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순간 TV 카메라에 클로즈업으로 잡힌 유 9단의 얼굴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쓴 미소가 번졌다. ‘이거 심하지 않느냐’ ‘어처구니 없다’는 의미와 함께 벼랑 끝에서 버티는 상대에게 뭔가 승부의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섞여 있었다.

백이 응징의 칼날을 뽑는 것은 당연한 수순. 감정이 격해진 유 9단의 선택은 백 3. 꽤 심한 흑을 즉결처분 하겠다는 초조함이었다.

하지만 흑이 4로 중앙을 뻗으니 백 5로 끊을 수밖에 없었고 6으로 간단히 연결해 버렸다. 더욱 큰 문제는 우변에서 중앙으로 이어진 백 세력이 갑자기 허약해진 것.

백은 흑을 살려주더라도 중앙을 봉쇄했어야 했다. 흑이 살아갈 때 중앙을 두텁게 하면 백의 우세는 여전했다.

이후 백 대마는 알토란 같은 백 ○를 뜯기는 수모를 겪으며 겨우 2집 내고 살았다. 흑 3집반승. 한순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유 9단과 승부의 고비를 배짱 하나로 움켜쥔 이 3단의 승부는 여기서 갈렸다.

유 9단은 대국이 끝난 뒤 “왜 이렇게 실수를 많이 했지”하고 되뇌었다. 하지만 그 실수는 실력보다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g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