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산을 옮기고자 했다. 무리한 일이었다. 격려는 하겠지만 힘겨운 시도가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차범근, 허정무, 최순호, 김주성….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했던 선배들도 거친 항해 끝에 겨우 좌초를 면하고 귀항했을 뿐, 그 아쉬웠던 과거사가 모든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삽씩 떠서 날랐다. 거스 히딩크가 있었고 홍명보가 있었다. 그들은 관록이란 이름의 게으름과 권위를 사절했다. 오히려 먼저 삽을 들었다. 거칠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조금씩 산이 움직였다. 그러자 팔짱을 끼던 사람들까지 천지의 변화를 꿈꾸며 모여들었다. 아, 마침내 산이 옮겨졌다. 밤하늘 아래 희미하게 새로운 대지가 펼쳐졌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거지?’ 꿈인 듯 믿기 어려운 파란만장의 나날을 이겨낸 그들은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대지를 향해 걸어갔다.
맨 앞에 황선홍이 섰다. 그는 한없는 그리움으로 공을 찼다. 불우했던 소년기, 고독하고 우울한 성장기를 보내면서 그는 오로지 공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 삶의 허기가 그를 아름다운 맹수로 단련시켰다. 십자인대가 두 번이나 끊기는 치명적인 부상을 이겨낸 그는 A매치 100회 출장의 위업과 함께 오늘의 역사를 견인했다. 후반전 30분을 남기고 잔디를 밟은 황선홍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에 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바늘을 꽂기도 어려울 만큼 밀집된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교란하였고 마침내 숨어있던 2인치를 찾아내 그 진공 상태 속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패스를 올렸다. 그러자 산이 움직였다. 설기현은 대선배 황선홍이 오늘 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될 수 있도록 침착하게 골네트를 흔들었다.
안정환이 뒤를 따랐다. 그가 노려본 산은 차라리 거대한 산맥이었다. ‘빗장 수비’는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었다. 골짜기를 파고들고 능선을 뛰어넘어도 이탈리아는 좀처럼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산허리를 잘라 버릴 듯한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지만 안정환의 발은 중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축구의 신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 연장전의 드라마를 배려함으로써 안정환은 오늘, 전 지구의 미디어가 자신의 이름으로 찬란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운재. 그가 배후의 모든 것을 책임졌기 때문에 최전방의 전사들은 앞만 노려볼 수 있었다. 유능한 화가가 정교하게 그려낸 듯한 이탈리아의 파상 공세를 이운재는 긴장할수록 더욱 차분해지는 얼음 같은 침착성으로 끊어버렸다. 아쉬운 한 골을 허용했지만 그것은 축구의 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역부족의 상황. 이후, 그는 저 멀리 마주선 유럽 최고의 골키퍼 부폰을 압도할 만큼 능란하고 침착했다.
엊그제 그들은 전설을 썼다.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행복했다. 첫 승과 16강만으로도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등재되었다. 그런데 이젠 신화의 서막까지 써낸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이젠 더 이상 꿈꾸고 싶은 것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에너지는 더욱 충만되었고 눈빛은 지구의 반대편까지 노려볼 만큼 예리해졌다.
그들은 산을 옮겼고 이제 새로운 대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다. 대지의 흙냄새를 맡은 아름다운 젊은이들에게 신새벽에 아름다운 태양이 떠올랐다.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