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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짓는 집]'서점 사라지는 종로'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

입력 | 2002-06-21 19:12:00


19세기 후반에 서울을 여행한 모리스 쿠랑은 ‘조선문화사 서설’에서 “서점은 전부 도심지대에 집중돼 종각부터 남대문까지 기다란 곡선을 그리고 나아간 큰길가에 자리잡고 있다”고 썼다. 더 정확하게 위치를 잡는다면 “정월 보름날 한밤 중에 조선 사람들이 그해 1년 동안 류머티즘에 걸리지 않도록 답교를 하는 돌다리 가까이”다. 보나마나 이 돌다리는 광(통)교다.

지금의 광교 주변이 오래 전부터 독서 문화가 발달한 곳임은 조선 헌종 때 조수삼의 ‘추재집’에도 나온다.

이 책에는 동대문 밖에 살던 전기수라는 사람이 소개돼 있다. 전기수는 직업적으로 ‘숙향전’ ‘심청전’ 같은 언문 소설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던 사람인데, ‘매달 초하루는 제일교 아래, 초이틀은 제이교 아래’ 이런 식으로 장소를 옮겨 가다가 제일 마지막에는 종각 앞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정조 때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에 나오는 바, 소설의 내용에 몰입된 청중이 이야기 꾼을 담배 써는 칼로 죽였던 곳도 바로 이 부근이다.

광교에 근대적 의미의 서점이 들어선 것은 1897년의 일이다. 조흥은행 본점 남쪽에 회동서관이 문을 열었다. 그 이후로 종로 네거리의 남쪽과 동쪽 방향에 덕흥서림 동양서림 박문서관 영창서관 등이 연이어 들어 섰다. 1927년 월간 ‘별건곤’ 1월호에 보면 서울의 간판 문화에 대한 조각가 김복진과 삽화가 안석주의 좌담이 나오는데, 종로 서점들의 간판은 글씨도 신통치 못한 데다가 테두리의 빛과 바닥의 빛이 형편없다고 지적했다. 더 웃긴 것은 간판마다 난로 연통을 뚫어놓은 것이라고 안석주는 덧붙였다.

그 몰취미는 혹시 서적조합에서 결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았다니 1931년 교문서관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종로서적의 간판 역시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간판이야 어찌 됐건 이로써 종로서적의 역사적 의미는 분명해진다. 종로서적은 조선 후기 이래 광교 부근의 독서와 서점 문화가 여전함을 보여준 셈이었는데, 이제 종로서적이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고 하니 그 섭섭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는 종로에 도착한 관광 안내원이 일본인 광객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종로의 호화로운 간판 사이에서 서점 간판 하나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리하여 종로가 그저 소매치기나 주의해야할 곳으로 남게 된다면 그건 우리가 배울 부끄러움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뜻이겠다.

소설가 larvatus@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