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전여옥씨
나는 요즘 정상이 아니다. 일종의 '하이퍼'상태이다.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이상할 정도의 자신감이 철철 넘치고 있다. 안되는 일이 없을 것 같고 매사가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마약을 먹은 이들의 황홀경이 이런 것이려니 짐작한다.
그 이유는 월드컵 축구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면 '월드컵의 남자들'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손을 전혀 쓰지 않고 이렇다 할 룰도 없는 축구라는 운동을 무식하다면서 마구 폄훼해 왔다. 그것은 '군대에서 한 축구'이야기에 열광하는 한국 남자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쓰리 쿠션'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이 축구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그 원시성에, 그 순수성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성'에-.
남자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이렇게 힘차고, 이렇게 투지있고 이렇게 용감한 줄을 몰랐다. 내 주변의 남자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그러나 내가 열망했던 남성들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22명이나!
정밀한 슬로비디오에 잡힌 그들의 단단한 탄력을 지니고 흔들리는 허벅지는 차라리 눈을 감게 만들 정도로 섹시하다. '절정의 골'을 향해 쉼없이 뛰는 그들을 보면 나 역시 '최고점'에 치닫는 듯한 기분이다. 누가 자기가 쓴 원고를 칭찬할 때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내 친구는 요즘 '월드컵'을 보며 '짜릿한 오르가즘'을 맛본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한골이 들어갔을 때 그 순간! 포효하는 선수의 모습은 내게 가장 신선하고 건강한 '포르노그라피'적 상상을 하게 한다.
대 스페인전에서 홍명보가 결정적인 한골을 성공시켰을 때 홍명보의 그 어린아이같은 얼굴을 보라. 순수하고 깨끗하다. 마치 품에 안고 '우리 아가-참 잘했어'하고 싶을 정도로 모성 본능을 일깨우는 여섯 살짜리 우리 아들의 얼굴과 같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는 다르다. 홍명보의 한골이 들어갔을 때 그는 전과 다른 다른 제스추어를 보여줬다. 그 특유의 나름대로 연출된(?) 손짓이 아니라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를 흔들며 순간적으로 고통과 환희의 표정이 오갔다.
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남자들이 어떤 때 그런 표정을 짓는가를-수많은 일을 겪고 많은 여성을 알고 있는 남성의 숨겨진 강렬한 매력이 전해진다. 나는 그 순간 엘리자베스를 부러워했다.
월드컵에서는 남자들의 본능이 폭발하고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들은 탐욕스럽게 이 남자들의 '메가톤급으로 폭발하는 성적 에너지'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안타깝지만 매우 안전한 이 간접적인 '성적 에너지'는 내게 어떻게 발산되는가? 나는 내게 금기된 것들을 취한다. 평소에 더 살찔까 걱정돼 먹지 않는, 기름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는 튀긴 치킨에다 맥주를 원없이 마셔가며 경기를 본다.
마치 영화 '데미지'의 여주인공 쥴리엣 비노쉬가 능력있는 경제장관으로서 TV토론을 하는 제러미 아이언스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샌드위치를 입으로 우겨넣듯이-음-정말 맛있다. 그 순간 먹는 치킨과 맥주는!
남자들은 전후반 90분, 연장전까지 가면서 나를 즐겁게 한다. 얼마전 만난 최일도 목사는 '종교가 축구 정도의 즐거움을 줘야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보다 더 현실적으로 내 곁의 남자들이 축구 정도의, 아니 그 반의 반의 즐거움을 내게 줬으면 한다. 심판의 레드카드를 받고 웃으며 퇴장하는 호나우디뉴의 얼굴을 보라. 경기에 지고 순수하게 자기탓을 하는 거룩한 바티스투타의 탄식을 보라. 그리고 피구는 말했지 않는가? 더 이상 대표팀에서 뛰지 않을 뜻을 암시하며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떠날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 남자들은 떠날 줄을 모른다. 분명 지난 선거에서 국민들은, 그 절반의 투표자인 '여성'들은 확실한 '레드 카드'를 내밀었건만 늙어 다리 힘도 없어 보이는 늙은 남자는 여전히 뛰어보겠다고 나선다. 축구 선수들은 스스로 떠난다.
고수들은 체력이 다하기 전에, 다리 힘이 딸리기 전에 무엇보다 '관객이 알아보기 전에' 미리 떠난다. 죽음을 준비하는 맹수가 홀연히 사라지듯 그들은 그렇게 용감하게 우리곁을 떠난다.
이렇게 내 마음에 드는 남자들을 나는 이전에 본적이 없다. 그리고 이토록 나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만족시킨 남자들도 나는 본적이 없었다.
전여옥 방송인·㈜인류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