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김득구는 1982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WBA 라이트급 세계 타이틀을 놓고 맨시니와 혈전을 벌이다 쓰러진 비운의 복서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지난해 ‘친구’로 820만 관객 신화를 일군 곽경택 감독의 75억원짜리 신작 ‘챔피언’이 부활시킨 김득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성공 가도를 달리던 ‘헝그리 복서’의 전형이었다. 강원도 토박이 사투리를 쓰며, 무일푼으로 ‘동아 프로모숀’에 입관해 한계단씩 올라섰다. 푼돈에 피멍도 들었지만, 영화 속 그는 큰 어려움없이 동양챔피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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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곽 감독은 줄거리의 가닥을 잡으면서 ‘촌뜨기 복서의 성공기’냐 ‘이국에서 쓰러진 비운의 복서’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했을 법하다. 그는 결국 후자에 익숙한 관객의 기억보다 김득구가 살다간 27년의 ‘연대기’에 승부를 걸었다.
영화는 라스베이거스 혈전을 도입부에 2, 3분 배치한 뒤 김득구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등 82년 이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운명의 링’은 마지막 20여분을 남겨놓고 다시 등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화는 챔피언 시리즈 특유의 격정과 에너지보다 인간 김득구에 대한 ‘오마주’(Homage·경의)로 이어진다.
영화 ‘챔피언’은 김득구를 권투 영웅이 아니라 순수함과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그려냈다. 그는 “팔이 세 개 달린 사람이 없기에 권투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며 성실히 살았다. 여자 문제로 탈선 직전에 있던 그는 “권투 선수는 미스코리아보다 거울을 더 많이 보면서 자신을 이겨야 한다”는 관장의 말을 듣고 다시 선다. 곽 감독은 이 같은 일화들을 통해 전설과 비운으로 ‘박제’된 복서를 인간으로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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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그 부활의 대가로 극적 긴장과 갈등을 놓친다. 실존 인물이었던 김득구를 부활시키려면 더 깊숙이 김득구의 심각한 고민과 자잘한 일상을 파고 들었어야 했던 것.
영화 속 챔피언에게 별다른 장애가 없어 드라마의 박진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게 그 사례다. 친구 성봉(정두홍)과의 갈등은 사나이들간 긴장의 불꽃을 튀기지 않는다. 연인 경미(채민서)와의 갈등에도 격정이 없다.
또 ‘82년 운명의 링’이 갖는 임팩트를 애써 절제하려 한 것도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하다. 전형적인 인파이터였던 영화 속 김득구와 달리 곽 감독은 아웃 복서였고, 한국 축구대표팀 거스 히딩크 감독의 통렬한 어퍼컷 세리머니보다 잽 위주의 경기를 펼친 듯한 인상이다.
주연 유오성의 연기는 빛난다. 준비 과정에서 “어떻게 그런 탄탄한 가슴을 만들었느냐”는 칭찬을 받은 것은 물론 굶주린 늑대같은 눈빛은 더욱 번득였다. 24일밤 ‘챔피언’시사회에 참석한 맨시니는 “그 날 경기로 인한 고통을 이 자리에서야 결말을 지었다”며 “김득구는 챔피언의 마음을 가진 선수였다”고 말했다.12세 이상 관람가. 28일 개봉.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