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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조기숙/자율의 힘이 아름답다

입력 | 2002-06-25 18:49:00


과거 독재정권은 국민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켜 정치 냉소주의와 무관심을 부추길 목적으로 3S(sports, screen, sex) 정책을 추진했다. 국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스포츠에 열광하다 보면 집단 최면에 걸려 건전한 비판의식을 지닌 공동체는 상실되고 만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 축구경기만큼이나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준 ‘붉은 악마’의 응원전은 스포츠가 과거와는 정반대로 공동체 문화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단지 스포츠 경기와 응원을 통해 우리가 하나됨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다.

▼권위주의 흔든 시민조직▼

진정한 공동체 문화는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나 강요된 충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개인의 자율성을 토대로 한다. 거리응원이 높은 질서의식을 보인 것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군중심리나 획일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필자가 만난 거리응원단은 군중이 아니라 자율성과 깨어있는 의식을 갖춘 거대한 시민의 집합이었다.

올해 ‘붉은 악마’와 함께 우리 사회에 깜짝 놀랄 변화를 가져온 단체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을 꼽을 수 있다. 두 단체의 공통점은 주도적인 리더 없이 인터넷을 통해 형성된 회원 중심의 거대한 자발적 결사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질서하기보다는 민주적이며 창의적인 조직 운영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주장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자발적 결사체의 수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도 성 학벌 연령 직업을 뛰어넘는 회원 중심의 자발적 결사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붉은 악마’는 정치조직도 아니고 그렇게 전환될 가능성도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자율적인 조직 운영을 경험해본 회원들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면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의 저변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혹자는 동창회나 향우회도 자발적 결사체이고 이런 단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을 해왔는데 ‘붉은 악마’나 ‘노사모’에 대해 새삼 감격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교수는 향우회가 시민단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향우회와 자발적 결사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비판의식의 유무에 있다. 혈연, 지연, 학연 집단에 대한 충성은 비판의식이 없기에 무조건적이다. 3김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는 유권자가 한국정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자발적 결사체는 항상 열린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어 소의를 위해 대의를 희생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결사체의 집단이기주의로 국가 이익을 저해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스포츠신문과 스포츠케이블TV밖에 없는 것처럼 매스컴이 획일적이다. 하지만 ‘붉은 악마’ 홈페이지에서는 월드컵 승리에 대한 집착이 순수한 축구사랑을 깨뜨리는 것을 경계하는 칼럼과 그들의 비판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자 이에 실망한 회원들이 노사모를 떠나기도 했다. 노 후보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는 회원도 맹목적인 충성 때문이 아니라 아직 노 후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이르다며 더 지켜보겠다는 부류이거나 노 후보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공감하는 부류다. 일부에서는 노 후보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사모’ 회원으로부터 사이버 테러를 당했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이들은 ‘노사모’가 과연 제대로 된 비판의식이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 노 후보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썼지만 ‘노사모’로부터 어떠한 항의도 받은 적이 없다. 노 후보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단지 흠집내기가 아니었는지를 먼저 반성한다면 ‘노사모’를 룸펜, 사이비 종교집단, 홍위병이라고 부르는 시대착오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비판의식 버리면 안돼▼

요즘 ‘노사모’가 노선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고 한다. 월드컵이 끝나면 ‘붉은 악마’도 향후 나아갈 방향을 놓고 혼선에 빠질지 모른다. 예측하지 못한 성공 뒤에는 으레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 조직의 생명력이 비판의식과 자율성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