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은행의 경기지역 한 지점에는 몇 년 전 월말이면 공과금 지로용지를 손에 든 고객이 밀려들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30m 옆에 있는 경쟁 은행의 지점이 월말이면 대기번호표 발급기를 치우면서 고객에게 “줄을 서라”고 요구했고 줄서기가 귀찮은 고객들이 한미은행 지점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경쟁은행의 논리는 간단했다. 전기료 등 공과금 수납 처리에 드는 원가는 건당 600∼2000원. 그러나 한국전력 등 거래처에서 받는 비용은 원가에 못미쳐 손님을 맞을수록 손해다. “손실을 끼치는 고객을 잠시 다른 곳으로 보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고객은 왕’이란 오랜 믿음이 깨져가고 있다. 시중은행 마케팅팀장들의 요즘 화두는 “어떻게 하면 고객 떼어내기(디마케팅·demarketing)를 부작용 없이 이뤄내 수익을 높일까”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고객 1인당 손익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디마케팅 기법이 퍼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예쁜 고객, ‘덜 예쁜’ 고객〓지난해 A은행 마케팅팀장은 고객이 은행에 얼마나 이익을 안겨 주는지를 분석하다가 깜짝 놀랐다. 전체 1470만명 고객 가운데 35%인 514만명은 1년에 이익을 1000원도 안겨주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 이 팀장은 “1000원의 이익을 남기려면 보통예금 기준으로 3개월 평균잔액이 3만원이면 충분하다”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조사팀은 또 평시 이 은행과 아무런 거래가 없는 ‘비(非)고객’ 약 200만명이 이 은행 창구에서 공과금만 납부한 사실도 밝혀냈다.
한 카드전업사의 콜센터에 걸려오는 전화는 하루 18만통. 이 회사는 초우량(VIP)고객이 주민등록번호나 카드번호를 입력하면 상담원에게 8∼10초 만에 연결되지만 일반고객은 45초가량 걸린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덜 예쁜’ 고객은 긴 대기시간 외에도 정중하지만 단호한 답변을 감내해야 한다. 상담원은 신용한도가 줄어든 고객이 항의할 때 “다른 카드사에 연체가 있는 만큼 신용한도를 깎을 수밖에 없다”고 답변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때 상당수 고객은 카드사를 비난하면서 거래를 끊는다. 고객은 자신이 거래를 끊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카드사 측이 고객을 떨어내기 위해 신용한도를 계속 축소하면서 압박을 해온 것이다.
SK텔레콤도 지난해 6월까지 1년간 ‘고객 물갈이형’ 디마케팅을 도입했다. ‘011+017 합병’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가 “1년간 (가입자 수 기준)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겨선 안 된다”고 시정명령을 내린 탓이다. SK텔레콤 허재영 과장은 “시장점유율 50%를 유지하기 위해선 월평균 사용액이 많은 영업사원을 집중적으로 유치하고 연체고객을 떨어내는 작업을 병행했다”고 말했다.
▽고객평가는 원가분석에서〓디마케팅은 정밀한 원가분석에서 시작된다. 우리은행 이재연 차장은 지난해 11월 스톱워치를 들고 표본 지점을 순회했다. 창구 여직원이 고객이 맡긴 송금 처리, 외화송금 등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초 단위까지 측정했다. 그 결과 보통예금통장을 새로 만들어주는 데 드는 비용이 6194원이란 사실 등을 알아냈다.
우리은행 박성일 부장은 “고객 한 사람이 남기는 이익을 파악하기 위해선 1년간 은행창구를 몇 번 이용하는지도 감안하고 있다”며 “과학적 원가분석을 활용해 직원 업무를 평가하고 이자율을 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조사결과 똑같은 ‘10만원 송금’이라도 은행창구에서 처리하면 원가가 1613원, 자동입출금기(ATM)이나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면 각각 286원, 20원이란 것도 알아냈다.
국민은행 김영일 부행장은 “수익에 덜 기여하는 고객은 가급적 창구보다는 자동화기기를 사용하도록 창구이용료를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객의 저항〓은행 카드사 이동통신회사는 드러내놓고 디마케팅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LG경제연구원 이승일 선임연구위원은 “고객이 알게 되면 역효과가 큰 만큼 기업으로선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상습적인 반품고객의 명단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진 홈쇼핑 업체들도 “명단을 알려면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고객을 떼어버릴 수 있느냐”고 부인했다.
디마케팅을 당한 고객이 느끼는 박탈감은 나이트클럽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일부 나이트클럽은 이른바 ‘물 관리’를 위해 나이 든 고객의 입장을 막는 원시적인 디마케팅을 벌이기도 한다.
제일은행은 지난해 초 원가분석을 근거로 잔액이 10만원 이하인 계좌에 계좌유지 수수료를 부과했지만 고객의 반발로 사실상 백지화한 것도 소비자의 저항의 좋은 사례다. 구경철 팀장은 “제일은행 내 여러 계좌에 조금씩 흩어진 돈을 한곳에 모으면 해결되는 사안이었지만 고객을 이해시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현재는 제일은행을 제외한 전체 시중은행이 ‘예금액이 50만원 이하’일 때는 이자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소액 예금자’를 압박하고 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