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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스테디셀러]'사평역에서'

입력 | 2002-06-28 18:23:00


◇ 사평역에서/곽재구 지음/146쪽 5000원 창작과 비평사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1981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곽재구 시인(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사평역(沙平驛)에서’ 중 일부이다.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다. 전라남도의 남평역이라는 작은 역사(驛舍)가 모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시에서 광주 민주화 항쟁 직후의 암울한 상황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언뜻 보면 서정적인 풍광을 묘사한 낭만시로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질곡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의 고뇌, 화해와 사랑을 위한 염원이 담겨있다. 깊은 밤 간이역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그래도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희망을 그린다.

그의 첫 시집 ‘사평역에서’는 1983년 초판이 나온 뒤 지금까지 소리소문없이 10만부가 넘게 팔렸고, 요즘도 월 200부 이상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 측은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접근한 그의 시 세계가 독자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며 “간결하면서 솔직담백한 문장이 오랜 생명력을 갖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 시집은 그가 바라본 세상 이야기이다. 1982년 미국의 맨시니와 접전 끝에 하늘로 떠난 권투선수 김득구를 “너는 부서질 줄을 알고 너는 너의 슬픔의 한없는 깊이를 안다”(김득구)고 회상했고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그리움에게)며 피붙이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내비친다. 이밖에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희망을 위하여’ 등 제목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 63편을 수록했다.

20년이나 지난 이 시집을 다시 읽으며 불현듯 기차 여행이 떠나고 싶어진다. 철길 옆으로 펼쳐진 풍경과 이름 모를 역에 내려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