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났다. 그라운드는 텅 비었고 고생과 기쁨을 동시에 겪은 자원봉사자들이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처럼 골문 뒤에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대구월드컵경기장. 여기까지 오리라고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나 역사의 항로는 전국을 돌아 마침내 대구 외곽의 거대한 스타디움에 닻을 내렸다. 마침 물기를 가득 머금은 강풍이 녹색의 그라운드를 쓸고 지나간다. 월드컵의 환희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남태평양에서 대기하던 장맛비가 이제야 북상 중이다. 아마 며칠 동안 한반도는 비에 젖을 것이다.
잠깐 숨을 멈추고 냉철하게 주어진 경기 그 자체를 존중했어야 옳았다. 아무리 쾌거 이후의 잔치판이지만 그 어떤 경기도 승부의 긴장으로 경건하게 존중했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특별 휴가와 황선홍, 김남일, 최진철의 부상으로 백두대간이 흔들린 우리 선수들은 시작 휘슬 직후의 황급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89분간 분전했으나 ‘세계 4위’라는 아쉬운 결과에 머물렀다.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 압박의 투혼은 어떤 경기에서도 아름다운 것. 호화 전세기에 와인 파티를 했던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휴양지 마카오에서 가장 늦게 한반도에 들어온 포르투갈은 어디로 갔는가. 4년 전의 전략과 전술, 베스트 11도 변하지 않고 동아시아에 온 이탈리아는 무엇을 남겼던가. 물론 우리 선수들은 16강 이후로부터 지금껏 우주의 질서를 뒤바꾸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그로써 세계 축구사의 2막을 열어젖히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럼에도 3, 4위전은 그 자체로 겸허하고 신중한 태도가 필요했으며 그라운드는 그 어떤 흥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건하게 깨달았어야 했다.
어쨌든 잔치는 끝났다. 마무리는 아름다웠다. 종료 후 터키 선수들과 우리 선수들은 마치 야유회를 마친 동료들처럼 어깨동무로 하나되어 트랙을 돌았다. 하칸 쉬퀴르는 태극기를 들고 스탠드의 관중에게 인사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아낌없는 존경의 헹가래를 받았고 이운재는 자신의 이름이 뜨거운 열광으로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김병지와 최용수는 위로와 격려의 열렬한 박수를 받음으로써 마음 속의 상흔을 달랬다. 안정환. 그는 경기 직후의 세리머니에서 10여m 떨어짐으로써 승부사의 냉혹한 고독을 보여주었다. 내내 우리의 공격을 주도한 안정환은 당장이라도 한 게임을 더 뛸 의욕에 넘쳐있었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몇 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상심을 거두지 못하고 양 팀 선수들과 조금 떨어져 걷다가 벤치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 냉혹한 태도에서 우리 축구의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황선홍과 홍명보. 아, 이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는 장엄하게 막을 내리는 것인가. 뉘라서 두 선수의 10년 역사를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경기 유니폼이 아니라 훈련용 트레이닝복 차림의 두 선수가 오늘처럼 낯선 경우는 달리 없었다. 그들은 정녕 축구화 끈을 느슨하게 풀고 말 것인가. 텅 빈 그라운드를 휩쓰는 강풍 탓인지 마음이 쓰리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언제라도 쓸쓸한 것이지만 황선홍의 예고된 은퇴와 노장 선수들의 빈자리가 벌써 그라운드를 압도할 만큼 커 보인다.
두 거인이 사라진 그라운드에 거센 장대비를 예고하는 세찬 바람이 또 한번 쓸고 지나간다. 스탠드 상단의 라이트도 이윽고 꺼졌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정윤수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