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아! 나도 이런 곳에 유배 좀 보내줬으면….’
안개가 자욱히 낀 산길을 올라와 산의 품안에 포근히 안겨 있는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艸堂)을 마주하자 떠오른 생각이다. 좌우에 동암(東菴)과 서암(西菴)을 거느리고 단아하게 서 있는 다산초당. 이 지역에서는 풍부한 장서를 갖춘 서재를 빌려주고 저술을 도와준 학자들까지 있었다니 약 500권에 달한다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의 방대한 업적도 그다지 놀랄 일만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그가 유배를 왔을 때 처음부터 이런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경북 장기를 거쳐 강진에 내려와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는 강진읍내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동문 밖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한양에서 쫓겨 내려온 죄인인 데다 서학(西學·천주교)과도 연관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의 학덕이 알려지면서 8년만에야 해남 윤씨가 거주하던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됐다.
“다산이 그곳으로 옮기게 된 데는 당시 백련사에 계시던 혜장선사의 도움이 컸지요. 빈손으로 내려온 그에게 용돈도 주고 귀한 차도 가끔 보내줬어요. 다산(茶山)이란 호도 초당이 있던 산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여기서 지은 책도 대부분은 사실상 강진의 학자들이 쓴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분이었는데, 이제는 그 분도 강진도 모두 다산에 가려져 버렸어요.”
활기찬 손놀림으로 능숙하게 차를 우려내며 달변을 토해내는 백련사 주지 혜일스님은 정약용만 너무 알려진 것에 불만이 여간 아닌 듯했다.
정약용과 백련사의 관계는 산을 넘어 두 곳을 잇는 긴 오솔길을 봐도 짐작이 갈 만하다. 다산초당 뒤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이 운치 있는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정약용이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 형 약전(若銓)을 그리워하며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는 자리가 있다. 지금은 이를 기념해 ‘천일각(天一閣)’이란 정자가 세워진 이 자리에서 그는 존경하며 따르던 형을 그리워하다가 흑산도 대신 백련사로 가서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가 강진으로 내려올 때 이미 셋째형 약종(若鍾)이 참수를 당했고, 1816년에는 이곳에서 둘째형마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다산초당 (茶山艸堂)'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정약용은 15살 때(1777) 이가환(李家煥)과 이승훈(李承薰)을 따라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저술을 읽으면서 성호학파에 참여했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으로 성호학파를 잇고 있었고, 뒷날 조선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는 이승훈은 이가환의 조카이자 정약용의 매부였으므로 그와 성호학파의 인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 무렵 경기 광주의 천진암에서는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서학을 공부하는 강학회(講學會)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강학회에는 정약용의 형들과 약전의 처남인 이벽(李檗)도 참가했다. 8년 연상의 이벽은 특히 정약용이 학문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약용은 조선의 천주교 탄압 사실을 해외에 널리 알리려 했던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처숙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1791년 전남 진산에서 한 선비가 모친의 신주를 불태우고 가톨릭 방식으로 제례를 올린 진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게 된다. 그는 형제와 친척, 동지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배교자란 비난을 받으며 다산초당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백련사 앞 풍광
백련사에서 바라본 남해의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