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열렸던 날 광화문 일대에서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젊은이들. [동아일보 자료사진]
《‘밀실에서 광장으로.’ 이번 월드컵 거리 응원을 통해 돌연 등장한 ‘붉은 옷 세대’가 주목받고 있다. 10대 후반과 20대가 주축인 이들은 태극기를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와 거침없이 “대∼한민국”을 외쳐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이제 ‘광화문 세대’ ‘월드컵 세대’ ‘대∼한민국 세대’ 또는 ‘레드(red) 세대’라고 불린다. 돌연 등장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인가〓김호기(金皓起)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에 나타난 10∼20대는 50∼60대 산업화세대나 30∼40대 민주화세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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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큰 격변도, 어려움도 없는 풍요로움 속에 자랐으나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란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옥죄며 살아왔던 이들이 응원전을 압박감을 해소하는 놀이공간이자 축제로 바꿔냈고 이 과정에서 자신 속에 있던 공동체의식, ‘내 안의 우리’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길거리 응원은 집단주의의 긍정적 발현이자 4·19, 80년 광주, 87년 6월항쟁 등으로 상징되는 시위문화의 맥을 잇는 것”이라며 “그러나 과거의 집단주의가 개인적 가치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거리 응원은 수평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설명했다.
9일 ‘붉은 악마의 사회적 의미’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 계획인 홍성태(洪性泰) 상지대 교양과 교수는 “이들의 등장으로 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세대론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을 묶어낸 것은 ‘반독재’ ‘민주주의’와 같은 이념이 아니라 인터넷과 휴대전화, 전광판 등 디지털 기술이다. 거리응원의 동력이 됐던 ‘붉은 악마’는 자발적 참여에 기초한 수평적 네트워킹의 힘을 보여주었다. 홈페이지에 ‘붉은 악마의 단관(단체관람) 장소는 광화문’이라는 팝업창을 띄우는 것만으로 수십만명이 모여든다.
밀실에서 ‘접속’에 열중하던 세대는 축제를 매개로 타인과의 ‘접촉’을 시작했고 감동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기쁨과 열광을 체험했다.
정효정(鄭孝貞·20·서울시립대 행정학과 1년)씨는 “요즘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모르는 사람과도 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길거리 응원 현상은 일회적인 것이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주장도 없지 않다. 현택수(玄宅洙)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무런 이념적 구심점이 없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잉반응”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단지 ‘즐거움’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태극기와 붉은 옷도 청바지처럼 하나의 패션이자 일시적 유행일 뿐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 열광적인 길거리 응원은 우리 민족이 가진 오랜 억눌림의 폭발이자 일종의 집단 최면상태라는 냉정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스포츠는 스포츠, 정치는 정치”〓‘광화문 세대’는 87년 6월 거리를 가득 메웠던 6월항쟁의 소위 ‘넥타이 부대’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새 세대는 정치나 이념이 아닌 놀이를 화두로 오직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신명, 열정을 표출하는 한판 축제를 벌였다.
이들은 철저히 탈정치적 세대다. 월드컵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오∼필승 코리아’를 ‘오∼피스(peace) 코리아’로 바꾸자거나 이 열기를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가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들은 이를 배제했다. 월드컵 기간 중 치러진 6·13 지방선거는 젊은층의 무관심으로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10일 한국-미국전이 열리기 직전 많은 이들이 거리 응원이 반미시위와 연결될 것을 우려했으나 기우에 그쳤다.
거리응원전에서 만난 양병웅(楊炳雄·20·신성대 호텔식품계열 1년)씨는 “우리더러 ‘레드 콤플렉스’를 날려버렸다는 어른들의 해석은 너무 정치적인 것”이라 지적했다. 자신들은 애초에 붉은 색에 대한 저항감은 없으며 북한을 붉게 칠하는 식의 교육은 받지 않았다는 것.
▽“즐거움이 우선”〓이 세대를 새로운 세대로 구분 짓기를 주저하는 현택수 교수도 이들이 갖는 즐거움의 코드에는 주목한다. 이들은 응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즐겼다’는 것.
한국과 독일의 4강전이 열린 25일 아침 9시부터 시청 앞 광장 앞자리를 얻기 위해 친구들과 줄을 서 있던 노병주(魯炳柱·20·숭실대 인터넷정보통신학 2년)씨는 “그냥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동연(李東淵) 문화연대 사무차장은 “축제는 일탈”이라며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감정을 발산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돌아갈 기운을 얻는 난장”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순수한 축제에 편승하려는 정치권이나 기업의 시도가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승전보가 그쳤어도 즐거움은 이어졌다. 우리 팀이 25일 4강전에서 패한 뒤 이들은 “괜찮아”를 연호하며 ‘오∼필승 코리아’를 더 크게 외쳐댔다. 터키와의 3, 4위전에서 패한 29일 밤에도 이들은 “잘 싸웠다”를 외치며 마지막 거리응원을 즐겼다.
이들은 ‘꼭 이기지 않아도’,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간직한 세대인 것이다. 강홍빈(康泓彬)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스스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이 세대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세대가 될 것”이라며 이들이 21세기 새로운 한국인의 원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외국인이 본 광장축제
조제 기마라이스 주한 브라질대사관 문화담당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거리에서 수백 발의 폭죽이 터지면서 브라질 ‘삼바 축제’는 화려한 막이 오른다.
퍼레이드 무대차 위에서는 현란한 깃털과 구슬장식으로 살짝 몸을 가린 늘씬한 미녀들이 관능미를 한껏 뿜어내고, 관중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삼바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축제의 열기에 흠뻑 빠져든다. 전통적으로 매년 부활절 전 40일간인 사순절(四旬節)을 앞둔 2월에 3박4일간 열리는 삼바 축제는 폭발적인 열기와 다채로움 때문에 세계 최고의 축제로 꼽힌다.
주한 브라질대사관의 조제 기마라이스 문화담당관(54)은 “브라질인은 중요한 비즈니스 일정도 삼바축제 이후로 미룰 만큼 축제를 즐긴다”며 “삼바축제는 인종 및 빈부갈등을 씻어내는 용광로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브라질인은 삼바 축제에 흠뻑 취해 고달픈 세상사를 잠시나마 훌훌 털어내고 잊는다고 전했다. 의사 교수 기업가 등 사회적 지위와 부를 소유한 계층들과 가난한 빈민들이 모두 삼바리듬에 맞춰 자신을 완전히 발가벗기며 하나가 된다는 것.
그러나 삼바축제도 축제 기간 중 발생하는 각종 폭력 사태로 인해 그 가치가 빛이 바랜 적이 많다. 브라질의 경제위기가 계속되던 1999년에는 각종 폭력으로 사망한 사람이 350명을 넘어서는 등 매년 폭력 사태가 빈발해 축제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기마라이스씨는 “그런 점에서 이번 월드컵 대회 기간 한국인들이 ‘거리응원전’에서 보여준 열정과 질서는 놀라웠다”고 말한다. 브라질 대도시에서는 축제나 축구 응원을 위해 수십만명이 모이면 패싸움 등 각종 사고가 나곤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
그는 특히 25일 열린 한국과 독일의 4강전을 예로 들며 “한국팀이 월드컵 본선에서 처음으로 패배해 길거리 응원단이 자칫 흥분할 수 있었는데도 오히려 독일팀의 결승 진출을 축하하고 자국팀을 격려하는 성숙한 매너를 보여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거리응원전이 한국의 축제 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거리응원 참가자 증가추이 (단위:명)일시경기광화문일대시청앞전국4일폴란드전10만- 50만10일미국전15만15만77만14일포르투갈전45만47만279만18일이탈리아전55만55만420만22일스페인전80만80만500만25일독일전55만80만700만29일 터키전30만50만214만경찰청 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