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의 화두는 역시 ‘대∼한민국’이었다. 붉은 악마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한국대표팀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4강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숨가쁜 취재 전쟁을 치렀던 해외 언론인들은 한국과 한국축구를 어떻게 평가할까. AFP통신의 수석 스포츠 편집장 어스킨 매컬로 기자(55)와 AP의 아시아 스포츠 편집장 존 파이 기자(34),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일 메사제로’의 피에로 메이 수석 대기자(60)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에 모여 가슴 속얘기들을 털어놨다.》
☞'포스트 월드컵 세계로…미래로…' 연재기사 보기
▼“월드컵, 일본도 개최했지만 주인은 한국”
1승에 목말라 하던 한국이 4강까지 진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축구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자.
▽매컬로〓한국의 선전은 누구에게든 예상치 못했던 충격이었다. 심지어 거스 히딩크 감독도 놀랐을 것이다. 대표팀의 정신력과 철저한 준비가 돋보였다.
▽메이〓이번 월드컵 전까지 한국 축구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한국팀의 플레이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세계 축구계가 변하고 있다. 그중 한국팀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일본보다 나았다. 한국은 골을 넣을 수 있으나 일본은 그만큼 되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중국도 앞으로 이러한 흐름을 타리라고 본다.
-아시아 국가간 격차가 심하게 드러난 대회였다. 아시아 축구를 어떻게 생각하나.
▽매컬로〓아시아 국가들은 감독이 스스로 팀을 운영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축구협회의 관료주의가 문제다. 하지만 이번에 히딩크 감독과 필리프 트루시에 일본 감독은 팀을 장악하고 그들 방식대로 운영했다.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본다.
▽파이〓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경기장 등 축구 인프라 구축에 성공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 양국이 해외의 축구 강호들과 맞부딪치며 전진했다는 것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세계로 나아가 부딪치는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한국은 평가전부터 유럽 강팀과의 힘든 경기로 미리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 진출해 성공할 가능성은? 또 주목한 선수가 있나.
▽매컬로〓능력과 기술면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적응의 문제다. 다른 언어, 다른 감독 스타일, 다른 음식, 다른 삶의 방식들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다. 일종의 문화 충격을 어떻게 이겨내느냐 하는 것이다. 뛰어난 능력의 외국 선수들이 유럽 클럽에 와서는 벤치만 지키고 있는 예가 허다하다. 유럽팀 감독들은 당연히 지금까지 팀을 운영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선수 기용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단순히 축구를 얼마나 잘 하느냐의 문제보다 어려운 것이다. 눈에 띄는 선수로는 최진철이다. 독일전에서 상대 선수의 다음 움직임을 미리 읽고 영리한 수비를 펼쳤다. 차두리 역시 엄청난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운재도 놀라웠는데 외국에 나가기에는 나이가 많아 약간 늦은 감이 있다. 이천수도 아주 빠르고 훌륭했다.
▽파이〓이천수가 정말 훌륭했다. 이미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훌륭한 전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매컬로씨가 지적했듯이 중요한 것은 적응이다. 이를 위해 14∼15세 때부터 매년 한두 달씩이라도 유럽의 유소년 축구학교에 단기 유학을 보내 경험을 미리 쌓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메이〓이운재, 마스크 맨(김태영), 박지성, 차두리가 훌륭했다. 그들이 이번에 보여준 능력을 봤을 때 유럽팀에서 뛰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인은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세계에 증명해 보였다.
-한국의 성공이 이어지자 음모론 등이 끊임없이 제기됐는데….
▽매컬로〓월드컵 때마다 음모론이 불거져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한국이 그런 음모에 대처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훌륭했다. 반응하지 말고 무시하는 것이 최상이다. 어떻게 설명해도 이탈리아나 스페인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한국은 독일전에서 훌륭한 경기를 통해 그 음모론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줬다.
▽파이〓홈어드밴티지는 어느 경기에도 있게 마련이고 그것 때문에 경기를 못했다는 것은 웃기는 핑계다. 홈어드밴티지는 경기를 즐겁고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메이〓나 역시 한국팀이 심판판정 때문에 이겼다는 음모론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대륙별로 할당해 심판을 뽑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느 나라 출신이든 세계 최고의 심판을 뽑아야지 할당에 얽매이다 보니 자질이 안 되는 심판을 뽑았다. 특히 부심이 문제였다.
-이탈리아의 반응에 현지 한국 교민들이 위협감까지 느낀다는데….
▽메이〓그런 것은 없다. 페루자 구단주가 말한 것도 농담이다. 축구도 농담이요, 인생도 농담이다. 화가 나서 한 소리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릴 거다.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폴란드를 이겼을 때 이탈리아 팬들은 기분이 좋아서 로마의 교황청으로 몰려가 “우리가 당신을 이겼소” 하면서 장난을 쳤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출신이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긴 후 서울에 있는 동안 한국사람들은 내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하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다 똑같은 것 아닌가. 하하하…. 이탈리아 사람들이 반한 감정을 선동하거나 불매운동을 벌인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국인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금방 수그러들 것이다. 특히 페루자는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관리해야 하고 아시아 출신 선수를 보유하는 것이 마케팅에 도움이 될 텐데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한국은 이겼고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은 졌다.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붉은 악마 응원단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떤 인상이었나.
▽매컬로〓놀라웠다. 전세계에 ‘한국 사람은 그렇게 많은 수가 모여도 서로 때리지 않고 끝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유럽에서는 당장 금지됐을 거다. 하지만 바로 그 장소에서 느끼는 열정, 흥분, 감정의 공유 등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고 전달할 수도 없었다. 내 평생, 그런 경험은 어디서도 해본 적이 없다.
▽파이〓애국심, 극단주의, 열정…. 이런 것은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뜨거운 감정의 분출은 정말 내 평생 처음이었다. 그런 감정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내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해야 한다면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봐야 한다”고밖에는 말 못하겠다.
▽메이〓아! 그 빨간 물결은 보기에 정말 아름다웠다. 훌리건 걱정없이 한국인들은 정말 행복했고 이탈리아 사람처럼 행복해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월드컵을 통해 본 한국인들은?
▽매컬로〓월드컵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이 훨씬 더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친절해졌고, 더 많은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흥미로운 변화다. 이러한 개방성이 더 자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메이〓한국 사람들은 아주 행복한 국민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한다. 서로 이해하기 참 쉽다. 서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삶을 즐기는 지중해 사람과 같다.
-한국의 이미지도 바뀌었나?
▽매컬로〓이미지가 딱 어떻게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월드컵 기간 중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로 글을 쓰는 경우가 80%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일본의 프레스센터는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한국은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88올림픽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는 총을 든 보안요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월드컵 공동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매컬로〓이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일본은 월드컵을 치렀을 뿐이고 한국은 월드컵의 주인으로 손님을 맞았다(Japan is holding the Worldcup. Korea is hosting the Worldcup). 더 이상 간명하게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메이〓한국인은 정말로 도와 주고 싶어한다. 일본인은 친절한 매너를 가졌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가슴으로부터 친절하다.
-월드컵이 아시아에서 열리는 바람에 특히 유럽의 불평이 많았다. 아시아에서 또 다시 이런 대회를 치를 기회가 있다고 보나.
▽매컬로〓선수가 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많이 탄다고 불평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일이다. 미국 월드컵 때 댈러스에서 한국이 경기하는 것을 봤다. 그들도 비행기를 오래 탔지만 잘 싸웠다. 아시아에서 개최 능력이 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외에 중국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과 일본은 7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이전에 누구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두 나라는 개최의 기준을 높여 놨다. 이 정도 할 수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나 남미에도 없을 것이고, 독일조차(웃음) 글쎄, 이만큼 하진 못할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수준을 너무 높여 놔서 어찌 보면 FIFA에 골칫거리를 안겨준 셈이 됐다. 한번 기준이 높아지면 낮추기는 어려우니까.
진행〓배극인기자bae2150@donga.com
정리〓박혜윤기자 parkhy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