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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전망대]김상영/'공적자금'알고 이야기 하자

입력 | 2002-07-01 17:46:00

김상영 / 경제부 차장


문민정부 시절 제일은행은 청와대 관계자의 청탁성 압력을 받고 사업성이 의심스러운 한보의 제철소 건립에 거액을 대출해줬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 한보가 부도나자 제일은행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출 위기를 맞았다. 시장논리대로라면 이때 제일은행을 파산시켰어야 한다.

하지만 거대 은행을 파산시키려면 사회 경제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 정부가 대신 물어줘야 할 예금만도 2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해 12조원이 넘는 거액의 공적자금이 제일은행에 투입됐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에 쏟아부은 156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의 실상은 대부분 이런 것이다. 다시 말해 공적자금은 40여년간 고도성장을 지속하면서 축적해온 한국경제 내부의 비리와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 금융질서가 엉망이 되자 이를 수술하기 위해 들어간 비용이다.

수술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경과는 대체로 성공적이어서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국내외 연구기관들이 인정하고 있다.

많은 국민은 공적자금 156조원이 이미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세금(재정)으로 부담한 돈은 20조원이다. 나머지는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기관투자가로부터 돈을 끌어다 사용했다. 국가가 빚을 얻어 급한 불을 껐다는 뜻이다. 이제 이 빚을 누가 갚느냐의 문제가 남은 것이다.

하지만 금융기관을 파탄에 빠뜨린 원인제공자들은 이미 파산했거나 경제능력을 상실했다. 돌이켜 보면 초고속 성장의 달콤함에 빠져 깊어가는 병에 애써 눈감아온 한국경제 시스템 자체가 원인제공자인 측면도 있다.

엄격히 말해 공적자금의 수혜자는 국가경제 전체이다. 예컨대 156조원의 공적자금 가운데 26조원은 문을 닫은 금융기관 대신 정부가 예금을 지급하는데 사용됐다.

부실 금융기관에 돈을 맡겼던 모든 예금자가 혜택을 본 것이다. 같은 논리로 출자나 출연을 통해 금융기관을 정상화한 혜택은 기업과 국민을 포함한 국가경제 전체가 누렸다.

따라서 ‘세금으로 갚다니 말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공적자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기에 영합하려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물론 주식소각을 전제로 한 출자나 예금대지급 등 투입 당시부터 회수가 불가능했던 공적자금이 아니라면 회수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운용과정에서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책임 추궁과 상환방안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공적자금을 제대로 알고 나서 싸워야 한다. 마치 공적자금이 어느날 갑자기 불거져 자신은 전혀 모르는 문제였던 것처럼 호통치는 초보수준의 정치 논평을 듣노라면 역겹기까지 하다.

김상영 경제부 차장 you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