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3년 1월 10일 ‘스파베르(Sparwer·바다 보라매)’란 상선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부근에서 출항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네시아 대만을 지나 종착지인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기나긴 동양 항해 길에 올랐다. 이 배에는 헨드리크 하멜을 포함해 64명의 선원들과 상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배가 대만과 나가사키 중간에서 모진 태풍을 만날 때까지는 곧 이루어질 무역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행복감에 겨워 있었다. 그러나 이 배는 곧 태풍을 만나 파선되었고 파도에 떠밀려 제주도 남쪽의 ‘가파도’에 도착했다. 1653년 8월 15일의 일이다. 승선 인원 64명 중에서 36명만이 살아 남았다.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하멜 일행은 병역에 복무하기도 하고, 고문받고 투옥되기도 하고, 벽지로 유배되기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14년 후 8명이 배를 훔쳐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서 네덜란드 배를 만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니 1668년 7월이었다. 실로 15년 만의 귀향이었다.
2001년 초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은 그때까지 국제 축구무대에서 계속 쓴잔을 들었던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감독으로 하멜의 나라 후손인 거스 히딩크를 기용했다.
그가 약 1년 간 지도한 후에도 한국팀은 국제 평가전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당연히 성급한 한국 사람들의 비판의 소나기가 그에게 퍼부어졌으나 이 감독은 말없이 비판의 소리를 참았다.
그는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약 1주일 전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 축구팀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것은 아마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점잖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는 장고하고, 계획하고, 그 계획에 따라 훈련시켰다. 그의 처방은 먹혀 들었다. 16강을 꿈꾸었던 한국팀은 히딩크 감독과 함께 4강에 들어갔다.
월드컵 폐막과 함께 국가대표팀과 그의 계약은 끝났다. 그가 한국에 남아 있건 떠나건 그의 신화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상암동 서울월드컵 경기장을 ‘히딩크 경기장’으로 명명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또 새로 완공된 난지도 하늘공원을 두 개의 ‘역사’를 연결지어 ‘하멜-히딩크 체육 공원’으로 부르면 어떨까. 필자는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공원에서 네덜란드의 범선 ‘홀랜디아’호가 한강을 유유히 거슬러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볼 그 날을 상상해 본다.
이근엽 한국-베트남 사회인문과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