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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윤선도의 혼 숨쉬는 '보길도'

입력 | 2002-07-02 16:46:00

예송 해수욕장은 '흑명석'이라 불리는 납작납작한 돌로덮여있다 [사진=김진경기자]


《‘보길도’하면 고산 윤선도(1587∼1671)라기에 그에 관한 책들을 끼고 전남 해남군 땅끝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다. 보길도까지 12㎞, 한시간 거리다. 고산이 보길도를 만난 것은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세 때. 50세에 향리인 해남에 돌아가 있던 고산은 병자호란 소식을 듣자 가복(家僕)을 이끌고 강화를 향해 진군했고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항복조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영영 세상을 등지겠다는 생각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제주도로 가는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돼 그곳에 터를 마련하고 ‘부용동’(芙蓉洞)이라 부른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바다 위에 떠 있는 10여개의 섬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방금 떠나온 땅끝 역시 한반도의 끝이라기보다 길게 이어진 조그만 섬들같이 느껴진다.

‘그의 이런 결심이 단지 호란의 패배로 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고, 그간에 겪은 정치적 부침으로 인한 우울한 심사가 중첩되었으리라 여겨진다.’(고미숙의 ‘한국고전문학작가론’)

고산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시 땅끝 쪽을 보자 아찔한 생각이 들며 벌써 뭍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고산은 ‘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어부사시사 추사 2수)고 하지 않았는가. 쾌속정을 타고 여름바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싱그럽다.

배가 이름도 예쁜 청별부두에 닿았다. 여기서 차로 5분여 걸려 도착한 곳이 바로 세연지(洗然池). 고산은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 세연정 회수담 석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는데 그 중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세연지다. 못 주위에 소나무 동백나무가 울창하다. 나무들을 돌아 다가가니 활짝 핀 연꽃이 관광객을 맞는다. 세연지와 인공연못인 회수담 사이에 세운 정자가 세연정. 건물터만 남아있던 세연정은 1992년에 복원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 정자에 아궁이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

신발을 벗고 세연정에 앉아서야 보길도가 제대로 보인다. 산과 물과 바위와 나무가 그대로 정자 안으로 들어온다. 굳이 세속의 미련을 씻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머릿속이 맑아진다.

‘사방을 둘러보면 산이 빙 둘러싸고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여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으니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윤위의 ‘보길도지’)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세운 세연정에 올라앉으면 보길도가 제대로 보인다 [사진=김진경기자]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지은 것은 65세 때였다. 해남의 산중에 또다른 은거지로 마련한 금쇄동과 이곳을 오가며 은둔 생활의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청별부두에서 예송리 예송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룬 해안선이기 때문에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섬 주위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수욕장은 ‘흑명석’이라 불리는 납작납작한 돌로 덮여있다. 돌들이 하도 맨질맨질해서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한여름 햇볕을 받아 뜨거워진 돌 위에 누우면 그게 바로 찜질방의 맥반석 침대라고.

그러나 본격적인 장마와 피서철을 앞두고 해수욕장에 망을 펼치고 다시마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한 촌로는 “이것도 며칠간 뿐이에요. 한동안 비가 오고, 그리고 피서객들이 쏟아져 들어오겠죠”라고 말한다. 주위엔 민박집이 즐비하다.

‘궂은 비 멎어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 배띄워라 배띄워라…찌그덩 찌그덩 어사와….’

이곳 출신 택시기사는 “‘어부사시사’는 바다를 상상하면서 읽으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권한다.

그러나 보길도는 고산을 잊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섬이다. 다음엔 꼭 고산 책일랑 집에 두고 떠나야겠다.

△배시간 문의 해남 땅끝(061-533-4269), 완도 화흥포(061-555-1010) △보길도내 택시는 모두 갤로퍼이며 보길도 일주 관광은 시간당 2만원. 보길택시(061-553-8876)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그곳에 가면…

청별 부두에 하선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세연정이다.

인공과 자연을 조화시켜 조성한 전통정원 안에 인공 연못(세연지와 회수담)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에 지은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 선생께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짓고 오우가를 노래하던 아담한 정자다. 비록 복원한 정자지만 운치가 있다.

특히 이곳에 있는 판석보(板石洑)는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은 약간 높이면서 다섯 개의 구멍을 뚫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낮추면서 두 개의 구멍을 뚫어 연못에 유입되는 물의 흐름과 압력을 조절하고 그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건너는 길을 평평한 돌(板石)로 깔아 건조할 때는 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도록 한 고산의 지혜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안은 부용동 안에는 이곳 세연정과 함께 고산이 기거하던 낙서재, 사색의 장소로 애용하던 동천석실과 옥소대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 어느 곳 하나, 고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35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문학적인 풍류와 선비로서의 고고함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보길도 동쪽 바다로 나가면 오른쪽에는 예송해수욕장이, 왼쪽으로는 중리해수욕장과 통리해수욕장이 있다. 예송은 검은 갯돌로, 중리와 통리는 흰 모래 사장으로 대조를 이루지만, 세 곳의 해수욕장 모두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울창한 해송과 상록수가 맑고 짙푸른 바닷물과 함께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섬을 일주하게 되면 일부 비포장도로도 있지만 맑고 푸른 청정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여러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6년 전 여름, 나는 모 신문사 논설위원과 함께 예정에 없이 보길도를 찾았다. 해박하면서도 넉넉한 마음을 가졌던 갤로퍼 택시운전사의 누님 집에서 농어회에 소주잔을 곁들였던 그때가 생각나면 나의 마음은 어느덧 보길도를 헤매게 된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