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세탁기. 어느 쪽이 전자제품인가.’
초등학생도 아는 쉬운 질문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최근 자동차의 흐름을 알고 보면 그리 대답하기 쉽지 않다.
세탁기에 내장된 전기 전자장치는 디스플레이, 모터, 파워코드, 각종 와이어, 마이크로 프로세서. 이들 부품은 세탁기 생산원가에서 30∼35%를 차지한다. 냉장고도 비슷하다.
▼에어백등 ‘지능’ 높아져▼
자동차는 이미 이 수준을 넘어섰다. EF쏘나타 등 중형 승용차는 기본 옵션에 항법(航法)장치를 달면 전기 전자장치가 생산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는다. BMW 7 시리즈나 폴크스바겐이 5월에 내놓은 파에톤 등 고급차는 전기 전자장치의 원가 비중이 50%에 이른다.
더구나 가솔린엔진과 전기모터를 동시에 쓸 수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은 70% 수준. 디지털 TV와 맞먹는다.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 박병완 이사는 “제품의 ‘지능’을 따져도 자동차가 가전제품보다 훨씬 높다”고 말한다.
세탁기나 냉장고에 내장된 컴퓨터칩은 8비트급. 오디오 기기는 16비트. 그러나 자동차에는 10∼60개의 각종 컴퓨터칩이 내장돼 있으며 이 가운데 엔진제어나 멀티미디어 기기에 쓰이는 컴퓨터칩은 펜티엄급인 32비트다.
1886년 가솔린 자동차가 처음 개발된 이후 100년간 자동차 전문가는 곧 기계 전문가였다. 그러나 80년대부터 전기 전자기술이 자동차의 핵심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우승기 이사는 “전자제품이 자동차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왔다”며 “최근 자동차회사가 뽑는 연구인력은 기계공학과보다 전기 전자관련 학과 인력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가 삼성의 자동차 산업 포기선언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는 것도 자동차의 디지털화 때문이다.
▽안전은 컴퓨터에 맡겨라〓95년 벤츠에 처음 장착돼 에쿠스 등 국내 고급 승용차에도 쓰이는 ‘차량자세 안정화장치’는 ABS보다 두 단계 나아간 첨단 장치. 8개의 센서와 한 개의 칩으로 이루어져 고속으로 코너를 돌 때 차량의 자세를 잡아준다. 고속주행시 운전자가 갑자기 핸들을 꺾어도 차가 뒤집히지 않는다. 내년부터 중형차급에도 장착된다.
에어백의 ‘지능’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BMW 7 시리즈 등 고급 승용차에 내장된 스마트 에어백은 사고 종류별로 자동차가 알아서 8개의 에어백 중 어느 것이 터져야 할지, 또 에어백이 터지는 속도와 각도를 스스로 조절한다.
일본의 한 트럭회사는 2000년 운전자가 핸들을 잡지 않아도 뒤차가 앞차를 자동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전방 차량 추종 시스템’을 개발해놓고 도로교통법 때문에 상용화하지 못하고 있다. 사고가 날 경우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
▼음성인식-고장진단 척척▼
▽집보다 편안한 자동차〓건물이나 주택에 지능을 부여한 인텔리전트 빌딩이나 홈 오토메이션 개념이 이미 자동차에도 적용돼 대중화의 길로 가고 있다. 국내에도 도입된 자동항법장치는 사고가 나 운전자가 정신을 잃어도 자동차가 알아서 콜센터에 사고 위치와 사고 부위를 알려준다. 자가진단기능을 통해 차의 어느 부위가 고장났는지도 알려준다. 정비사가 이미 고장 부위를 알고 준비해오기 때문에 견인할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고칠 수 있다.
유럽의 고급차에는 핸즈프리에 보이스 콜(Voice Call)기능이 장착돼 전화를 걸 때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 다임러크라이슬러벤츠는 게임기처럼 핸들을 없애고 조이스틱으로 조종하는 자동차도 이미 개발했으나 운전자의 습관 때문에 상용화하지 못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이 5월에 내놓은 고급승용차 ‘파에톤’에는 솔라센서가 내장돼 햇빛의 세기나 각도에 따라 에어컨 온도가 조절되며 각 좌석의 온도를 따로 조절할 수 있다. BMW 7 시리즈는 운전자가 없어도 차량 실내온도가 일정 수준 이상 상승하면 환풍장치가 자동으로 작동된다.
벤츠는 2000여 종류에 이르는 차 내부의 전선을 모두 없애고 단 두 줄의 광통신 선으로 대체했다. 자동차 내에 초고속 통신망이 깔린 셈.
음성인식업체인 MT콤은 현대모비스와 손잡고 음성으로 에어컨과 오디오를 조절하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또 운전자에게 온 e메일을 자동차가 음성으로 들려주는 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현대모비스 카일렉트로닉스 연구소 이정표 책임연구원은 “전세계적으로 공급과잉 상태인 자동차시장에서 고가(高價)의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의 응용이 절대적”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의 전기 전자기술이 상당한 수준인 만큼 10년 내에 한국차의 질적인 도약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전자화에 대한 우려〓자동차의 디지털화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전자장비가 도입되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장도 늘고 있다. 급발진 사고가 대표적인 예.
▼급발진 사고 부작용도▼
독일자동차공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차량 고장의 32.1%가 전기 전자장비와 관련된 것으로 고장 원인 1위를 차지했다.
자동차에 전기 전자장비가 많아지면서 배터리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차가 멈춰서는 일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배터리 전압을 14V에서 42V로 올리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은 최근 “자동차의 디지털화는 접촉사고 등 사소한 사고는 줄이지만 대형사고를 줄이지는 못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운전자가 차를 너무 믿고 과속하거나 방심하기 때문.
자동차의 디지털화는 또 자동차 값의 인상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도요타 자동차의 경우 공장내 전기 전자장비관련 인원만 1600명이며 연구소에도 이 분야 인원이 1000명에 이른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