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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구 한국체대 교수 "월드컵 4강 뿌리는 공차기 전통"

입력 | 2002-07-04 18:18:00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른 힘은 2000년 가까이 ‘공차기 문화’를 이어온 역사적 전통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심승구 한국체육대 교양학부 교수는 계간 ‘전통과 현대’ 여름호에 실린 논문 ‘한국 축국(蹴鞠)의 역사와 특성’에서 발로 공을 차는 놀이의 대표적 용어인 ‘축국’이 삼국시대때부터 쓰였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축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국내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김유신 장군과 함께 축국을 했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 교수는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100여년 이상 앞선 기록을 찾아냈다.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인 영실공과 궁궐 안 뜰에서 축구(蹴毬)를 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궁궐에서 공놀이를 즐긴 것으로 보아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일 가능성이 크다.”

송(宋)나라 ‘후한서’의 고구려전에는 “사람들이 축국에 능하였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가 왕실이나 귀족들이 즐겼던 제기차기 형식이었던 반면 고구려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구멍에 공을 넣는 형태였을 것이라는 게 심 교수의 얘기다.

통일신라나 발해 때는 축국 대신 기병들이 전술을 연마하는 수단으로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제기차기 형식의 축국(혹은 기구·氣毬)이 다시금 부활한다. 고려 중기의 문인 겸 학자였던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공에 비유해 “공기 가득차서 공이 되었을 땐 사람에게 한번 채여 하늘 높이 올랐는데/ 공기 빠지자 사람 또한 흩어지니 쭈그러져 하나의 빈 주머니만 남았구나”라고 읊었다.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냈던 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에는 그가 어린 시절 씨름과 축국을 일삼다 홀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축국이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국민적인 놀이문화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19세기말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도입되면서 공을 이용한 제기차기 형식은 점차 사라지고 엽전제기만 남았지만 짚으로 된 ‘짚공차기’, 동물의 방광에 바람을 불어 차는 ‘오줌보차기’도 있었다”며 “요즘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종이컵차기’도 이러한 공차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