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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수기]16강 약속 지키다

입력 | 2002-07-05 18:19:00

'해냈다' - 동아일보 자료사진


《솔직히 말하길 원하는가? 6월4일 폴란드와의 월드컵 첫 경기 전날 밤 나 역시 흥분했고 긴장했다. 한국 국민의 기대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늘 이미 완성된 강팀만 이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한국인 친구가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이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글 싣는 순서▼

- [히딩크 수기] 제2의 조국 대한민국
- [히딩크 수기] 한국축구와의 인연
- [히딩크 수기] 컨페더컵-골드컵 시련딛고
- [히딩크 수기] 평가전 잇단 선전 희망을 봤다
- [히딩크 수기] 16강 약속 지키다
- [히딩크 수기] 8강에 이은 4강 신화

▼“꿈을 이뤘다,하지만 더 큰 꿈이 있다”▼

나는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결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한국팀은 활력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폴란드를 맞았다. 대단한 경기였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훌륭한 플레이를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수들은 큰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홈구장에서 경기를 하는 만큼 사상 처음인 월드컵 첫 승리를 얻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국민의 기대가 엄청나게 높았던 것만큼이나 선수들의 긴장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팀은 결국 폴란드와의 경기를 이겼다. 선수들은 큰 성취감을 얻었고 나는 너무도 기뻐 몰래 혼자 비명을 질렀다. 늦은 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가 “아직도 사람들이 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한국인들의 기쁨을 전해줬다. 나는 비로소 이날 승리가 한국팀과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지만 첫 승리였고 첫 단추였을 뿐이다. 내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2회전(16강)에 진출해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전 승리는 끝이 아니었다.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에게 말했다. “이봐, 친구들! 오늘 훌륭한 경기를 펼쳤어.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시작일 뿐이야. 우리는 앞으로 갈 길이 멀어”라고.

두 번째 미국과의 경기는 그다지 실망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이 경기 역시 선수들이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그라운드에 나섰다. 미국은 매우 훌륭한 팀인데도 다소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포르투갈조차 미국팀과의 경기에서 어려운 경기를 펼치다가 결국 패하지 않았는가.

한국팀은 몇 차례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는 불운이 계속됐다. 하지만 한국팀은 물론 한국 국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점이 내가 한국 선수들과 한국 국민에 대해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다. 한국 선수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항상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미국팀과의 경기를 마친 후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었다. 나는 이것을 좋은 조짐으로 해석했다. 선수들이 미국과 비긴 데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수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날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쳤다면 나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완벽한 찬스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했고 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과의 경기 후 한국이 속한 D조는 새로운 ‘죽음의 조’로 떠올랐다. 앞서 포르투갈이 미국에 패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포르투갈은 미국을 과소평가했고 명성에 못 미치는 형편없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포르투갈이 미국에 패함으로써 한국은 상황이 조금 어려워졌다. 당초 예상은 우리가 폴란드를 이기고 포르투갈이 미국을 이기고 나면 한국과 포르투갈이 쉽게 2회전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포르투갈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비록 미국과의 첫 경기에서 졌지만 포르투갈은 세계적인 축구강국 중 하나다. 한국 선수들은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앞두고 매우 긴장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긴장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플레이와 전술을 보여줬다.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포르투갈과의 경기도중 폴란드가 미국을 이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선수들은 전반전에 그런 사실을 몰랐다. 전반전이 끝난 뒤 하프타임 때 일부 선수들이 폴란드-미국전 상황을 알았던 것 같다.

란드가 미국을 이기게 되면 우리는 포르투갈에 져도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협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스포츠가 아니다. 선수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 한국 선수들이 바로 그랬다. 포르투갈은 한국과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대충 경기를 치르고 비기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쳐 포르투갈을 당당히 이겼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포르투갈을 이김으로써 한국은 비로소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날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은 후 내게 달려들었던 것이 뉴스가 됐다는 걸 안다. 나는 평소 선수들을 개인별로 따로 만나지 않는다. 그게 나의 팀 관리 노하우다. 선수들을 따로 만나면 내가 누구만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게 마련이고 팀워크를 해치게 된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박지성을 꽉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넣은 골은 유럽 프로리그에서도 보기 힘든 세계 톱클래스의 골이었다.

한국이 16강 진출에 성공했을 때 난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가졌다. 한국팀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의 16강 진출은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었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나는 큰 경기를 마치고 나면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그날 밤을 자축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상대가 강팀이면 강팀일수록 반드시 이기겠다는 승부욕이 샘솟았다. 마침 다음 상대는 이탈리아였다.

정리〓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당신을 믿어요" - 동아일보 자료사진

▼‘시인’히딩크 말말말…▼

“히딩크 감독은 시인 같아요.”

지난 1년반 동안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한국축구대표 선수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대한축구협회 전한진 국제국 과장(31)은 “히딩크 감독은 대체로 직설적인 표현을 잘 안 한다”며 “거의 은유적인 표현을 하며 그의 얘기를 통역하다보면 시를 읽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 과장은 “이런 표현이 너무 많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며 “자, 열차처럼 힘차게 뛰어봐(Go like a train)와 같이 비유를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어떨 땐 책이나 영화, 신문 등에 나온 멋진 표현을 써가며 선수들에게 얘기해 제대로 통역해주기 힘들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내외신기자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의 수사학은 빛났다고. 당초 한국팀의 목표였던 월드컵 16강을 달성한 뒤 열린 인천 회복훈련장에선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I’m still hungry)”라며 8강, 4강까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또 스페인과의 8강전이 끝난 뒤 스페인팀이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자 “패한 팀은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The losing team should look in the mirror)”라며 패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선수들에 대해서는 ‘신뢰’의 표현으로 ‘내 새끼들(My boys)’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선수들을 ‘도그(dog·개, 녀석, 놈의 의미)’로 즐겨 부른다. 폴란드전이 끝난 뒤 ‘젊고 책임감 있는 녀석들(young responsible dogs)’이라고 불렀다. 묵묵히 자신을 믿고 따르는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히딩크의 믿음이 담긴 호칭이다. 그러나 전 과장에 따르면 훈련땐 ‘도그’란 표현을 단 한번도 쓴 적이 없다고.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