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 / 경제부 차장
대한생명이 한화그룹에 팔리는 쪽으로 진행될 것 같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지난달 하순 회의에서 한화 컨소시엄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한 것이다.
공자위는 선정 당시 △한화가 부채비율을 낮추는 등 충분한 재무능력을 갖출 것 △대한생명의 현재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가 대생의 감사 및 이사를 임명할 것 △대생은 3년간 한화그룹에 신규대출하지 말 것 등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공자위가 복잡한 조건을 내건 것은 공자위 내부의 반대의견을 무마해야 했기 때문. 공자위 매각심사소위 및 공자위 민간위원들의 과반수가 한화 컨소시엄을 선정하는 데 반대했던 것이다.
한 공자위원은 “매각심사소위 활동 과정에서 어떻게 정부가 위원회를 핫바지로 만드는지 잘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음은 그가 “앞으로 정부 관련 위원회에 참여하실 분들은 참고하라”며 제시한 대표적인 수법들.
(1)위원회는 공무원으로 구성된 사무국이 안건을 상정한 후에야 심의를 시작할 수 있다.사무국은 정책을 기정사실화한 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에야 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린다.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한다.
(2)위원장을 선출하거나 주요 내용을 결정하기 전에 미리 언론에 기정사실처럼 흘린다. 이를 항의하면 “원래 언론이 좀 앞서가지 않느냐”며 얼버무린다. 보도내용과 다른 방향으로 심의하려 들면 국제신인도 훼손 등을 들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3)규정상으로는 3일 전에 안건과 자료를 주도록 되어 있으나 그 바로 전날까지도 자료를 잘 주지 않는다. 막상 당일 위원회에 나가면 장문의 의결서가 준비되어 있다. 위원회가 난색을 표하면 사무국은 “내용에 위원회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겠다”며 거듭 읍소한다.
(4)위원들의 주장을 담되 결론은 뒤바뀐 보고서가 제출시한 12시간쯤 전에 e메일로 온다. 위원들이 내용에 항의하면 각개격파식으로 설득 작업을 한다. 대개의 위원들은 시간 제약 때문에 체념하고 만다.
(5)제대로 심의하려 들면 ‘위원회가 쓸데없는 일로 발목을 잡는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불평이 언론에 보도된다(물론 익명이다). 매각심사소위의 경우 안건이 4월 8일 상정된 후 일주일 만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이 민간위원의 말이 100%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관료들이 경청해야 할 내용이 꽤 많아 보인다.
이헌재(李憲宰)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걱정되는 구석도 없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위기 후 잠깐 겸허한 모습을 보이던 정부 관료들이 자신감을 지나치게 회복하면서 과거와 같은 전횡과 독선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대생 매각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예보는 곧 한화 컨소시엄과 구체적인 매각협상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일들에 공무원들의 아집이 또다시 개입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허승호 경제부차장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