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이 발생한 6월29일 한국이웃사랑회(회장 이일하) 대표단 39명은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사업을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 서해교전이 발생한 지 2시간10분 뒤였다. 대표단은 4박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난 뒤에야 서해교전의 심각성을 알았다.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동행한 동아일보 신석호 기자의 취재기를 싣는다.》
대표단을 태운 고려항공 JS152편이 중국 베이징(北京) 국제공항을 이륙한 것은 29일 낮 12시40분(한국시간). 서해교전이 발생한 지 2시간10분 뒤였다. 비행기는 1시간20분 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대표단을 마중 나온 10여명의 북한 안내원들은 서해교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첫 방문지인 평양 만수대 광장에서는 신혼부부와 하객들이 평화롭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평양 시민들의 말과 표정에서는 교전에 대한 아무런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북한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방송과 신문이 교전 사실을 보도했지만 내용은 자세하지 않았다. 대표단 일원이었던 오건환 삼미모피 전무(57)는 “29일 오후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서해에서 교전이 있었다’는 방송 뉴스를 보았지만 일상적인 대치 정도라는 느낌만 받았다”고 말했다. 대표단은 고려호텔에서는 신문을 볼 수 없었고 3일 삼지연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노동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5면에 게재된 두 건의 관련 기사는 ‘남측이 북측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북방한계선(NLL)은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웃사랑회 집행부는 29일 만찬장에서 교전 사실을 조금 자세히 전해 들었지만 대표단이 동요할까봐 알리지 않았다. 인솔 책임을 맡은 이윤상 기획실장(39·여)은 3일 중국 선양에 도착해서야 “우리를 초청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고위 관계자가 ‘상황이 악화되면 예정보다 일찍 출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걱정을 했다”고 전했다.
북측은 첫날 안내원을 20명이나 배치했지만 다음날부터 10명으로 줄였다.
대표단의 활동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가장 중요한 활동은 97년부터 이웃사랑회가 지원하고 있는 목장 5곳, 육아원 14곳, 병원 1곳 가운데 목장과 병원 1곳을 방문해 지원된 물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대표단은 30일 오후 평양 시내에서 소형승합차로 비포장도로를 2시간 달려 강동군 구빈리의 협동농장을 방문했다. 이 농장은 이웃사랑회가 지원한 각종 장비로 요구르트와 치즈를 생산, 하루 2t씩 인근 육아원 등에 공급하고 있다.
농장을 오가는 차 안에서 본 시골 풍경은 한국의 60, 70년대를 연상시켰다. 넓적한 돌을 얹은 기와집 주변에는 옥수수와 담배 벼 등이 자라고 있었다. 길을 따라 흐르는 개천에는 어린이들이 멱을 감다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대표단은 울산감리교회 익산영생감리교회 안산감리교회 등 이웃사랑회에 많은 후원금을 내는 교회의 목사와 신도, 그리고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원 등으로 구성됐다.
평양〓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