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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수기]재회를 기약하며

입력 | 2002-07-08 18:40:00

몸은 헤어지지만… - 동아일보 자료사진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과의 인연을 여기서 끝내자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한국팀을 위해 한동안의 이별이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나는 선수들과 늘 함께하길 좋아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한국팀은 당분간 그럴 기회가 없다. 한국에서는 내가 영웅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축구감독일 뿐이다. 축구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안정환 등 한국의 스타 선수들을 심하게 다룬 것도 이들이 그라운드 밖 인기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팀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이뤄낸 것들을 평가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팀은 이제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나는 오히려 한국축구의 미래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청소년팀의 어린 선수들(최성국 정조국 등)을 대표팀에 데리고 있었던 것도 그들이 한국축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인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한국축구가 ‘근본적’으로 세계 톱 클래스 수준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딩크화보 1(과거에서 현재까지) l 히딩크화보 2(세리모니와 환호)
히딩크화보 3(벤치 표정) l 히딩크화보 4(인기짱 히딩크)
히딩크화보 5(선수들과 연습하며)

▼글 싣는 순서▼

- [히딩크 수기] 제2의 조국 대한민국
- [히딩크 수기] 한국축구와의 인연
- [히딩크 수기] 컨페더컵-골드컵 시련딛고
- [히딩크 수기] 평가전 잇단 선전 희망을 봤다
- [히딩크 수기] 16강 약속 지키다
- [히딩크 수기] 8강에 이은 4강 신화
- [히딩크 수기] 재회를 기약하며

내가 한국 선수 중 일부를 데리고 갈 것이란 보도가 있었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내가 갈 구단과 좀 더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국축구를 돕고 싶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나는 한국 선수들이 유럽시장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팀에는 유럽 리그에서 훌륭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선수가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럽에 진출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맞는 팀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중요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돈을 더 준다고 해서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팀을 선택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미 안정환의 선례가 있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명성이 약한 팀에 가더라도 충분히 경험을 쌓고 한걸음 두걸음 나아가다 보면 명문 팀으로 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팀 이젠 홀로서기 할때

내가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팀에 있을 때 카메룬에서 온 포워드 에투를 데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17세였다.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명문 프로팀은 팀 내의 경쟁도 치열해서 선수들을 매우 긴장시킨다. 에투처럼 어린 선수들은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경기에도 자주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레알 마드리드보다는 순위가 떨어지는 스페인의 다른 팀으로 옮겨줬다. 그때부터 에투는 훌륭한 경기를 펼쳤고 그 팀의 주전 자리를 굳혔다. 물론 경기마다 출전할 수도 있었다. 한국선수들도 에투처럼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적당한 팀을 골라야 한다.

내가 누구를 데려갈지는 밝힐 수 없다. 한국 선수 개개인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선수들을 존중한다. 한국 K리그에서 뛰는 선수라고 해서 다음 월드컵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지난해 내가 한국 K리그를 두고 ‘워킹 게임(Walking Game)’이라고 한 게 오해를 샀던 모양인데 K리그를 모욕(insult)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경기인데도 관중석 중 많은 자리가 비고 팬의 압박(pressure)이 약한 경기장 분위기에 대한 생각을 말하려 했던 것뿐이다.

프로 선수는 매일 강한 압박 속에서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은 플레이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경기력도 향상될 수 있다. 선수들의 스피드와 투지도 관중의 압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향상된다. 월드컵 전까지 한국 대표선수들의 잔실수가 많았던 것은 한국 프로축구의 싸늘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느슨한 경기에 적응이 돼 있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처음에는 한국의 축구 열기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기장에 가족 단위로 오는 관객이 많은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럽에선 경기장이 열성팬 때문에 너무도 위험스러워 어린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6월 한달 동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한국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팬이 가장 많이 있었다. 오히려 세계 축구팬이 한국 관중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토록 열광적인 응원을 하고도 사고 한 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월드컵 기간 중 선보인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프로축구로 이어지길 바란다. 한국이 빠른 시일 안에 월드컵에 키스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것도 한국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응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한국팀과 한국에 실망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터키와의 3, 4위전 때처럼 선수들이 해서는 안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와 언론이 엉뚱한 기사로 한국팀을 분열시키려 했을 때 그랬다.

▼프로축구 더 활성화돼야

모든 경우에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려고 애썼다. 한국 사람들도 내게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논쟁이 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 한국은 내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 나라가 됐다. 나는 유럽에서 프로축구팀 감독이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함께 이뤄낸 것은 내 인생의 그 어느 부분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정몽준 회장이나 한국 국민의 성원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앞으로 한국 국민이 두고두고 동화처럼 얘기할 수 있는 한국의 4강 신화는 분명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 국민은 따뜻한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 국민을 사랑한다. 한국에서의 추억을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할 것이다. 한국과 한국축구에 영원한 행운을 빈다. 안녕히.

정리〓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떠날때를 아는 히딩크

새로운 도전 - 로이터뉴시스

“정상에 있을 때 떠나야 아름답다.”

7일 네덜란드로 떠난 거스 히딩크 감독.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적극적인 구애와 함께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잔류 요구를 뿌리치고 한국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히딩크 감독의 친구이자 잉글랜드의 축구칼럼니스트인 랍 휴스는 최근 기자에게 한가지 소식을 보내왔다. 3일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월드컵 4강 축하연 때 히딩크 감독이 그에게 “지금이 내가 떠날 때다. 내 정신이 온전할 때 떠나야 한다”고 밝혔다는 것. 이는 한국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에 도취하다 자칫 자신의 명성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어 떠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은 ‘정점에 있을 때 명예롭게 떠나야 한국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축구협회와 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서 한몸에 받던 인기를 다시 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히딩크 감독이 잉글랜드 이탈리아 등 유럽 빅리그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을 선택한 이유도 있다. 당분간 조용히 선수를 발굴하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는 의도다. 그는 98∼99시즌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시절 승패에 따라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단 한 시즌 만에 사퇴한 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즈 유나이티드의 영입 제의를 무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