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무력도발 이후 북한이 남북대화를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 30주년을 기념한다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과 노동신문 사설 등을 통해 유난히 남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철석같이 합의한 5월7일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2차 회의마저 “못하겠다”고, 그것도 회의 바로 하루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북한이 이제 와서 또 대화를 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느닷없이 무력도발을 하고는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는 그들의 심사를 어떻게 이해해 주어야 하는가. 분위기가 괜찮을때도 제대로 되지 않던 대화다. 북측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로 남측은 회의 자료만 수북이 쌓아놓고 멍하니 북쪽 하늘만 쳐다본 적이 한두 번인가.
▼문제는 진심이다▼
북한은 북-미대화가 완전 교착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남북대화를 제의해 올 가능성이 많다. 북한은 지난 10여년간 북-미대화와 남북대화를 동시에 추구한 적이 거의 없다. 북-미대화가 잘 되면 남북대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북-미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그 보완 수단으로 남북대화가 이용됐다. 남북대화가 북-미관계 개선에 미치는 ‘약효’를 북한은 믿고 있는 것 같다.
북한 내부 사정도 급하다. 6월 말 현재 북한의 재고 식량은 100만t 정도로 본격적인 추수가 있기 전인 9월이면 바닥이 난다고 한다. 햇감자와 옥수수가 있기는 하지만 식량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분석이다. 서해도발로 북한에 대한 평판은 더욱 나빠졌고 국제적인 지원도 작년 같지 않다. 경추위를 열면 30만∼40만t의 쌀을 지원하겠다는 남측의 몇 달 전 제의는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입장에서도 북측과의 접촉을 서둘러야 할 사연이 있다. 현 정권이 그토록 바라는 경의선 연결과 금강산 육로관광은 시기적으로 볼 때 지금 북측과 담판을 짓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렵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공사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장 북측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북한의 대화 강조에 부쩍 신경을 쓰면서 이달 말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는 백남순(白南淳) 외무상과 외무장관회담이라도 성사됐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다.
이런 마당에 북한이 5월7일 일방적으로 깬 경추위를 다시 열자고 제의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북한은 그런 제의를 하면서도 서해도발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를 하면 내부적으로 서해도발을 합리화시킨 모든 논리가 무너진다. 북측이 어물쩍 “우리 대화하자”고 하면 정부는 어떻게 할까. 대화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까.
정부가 보이지 않게 남북대화를 추진하든, 북한이 노골적으로 대화를 제의해 오든 현 시점에서의 남북대화는 또 한번 남-남 갈등을 촉발시킬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의 새로운 접촉을 통해 경의선이 연결되고 금강산 육로관광길이 열린다는 보장만 있으면 아무리 서해도발로 인한 국민의 분노가 크다 해도 남-남 갈등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주와 시베리아 대륙으로 치닫는 꿈의 철도가 연결되고, 반세기 동안 녹슨 철조망을 뚫고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는데 누가 환호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북측의 진심이다. 그 같은 사업들은 북측이 합의를 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합의는 해 놓고 실천을 하지 않으니 북측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북한이 경추위를 열어 경의선 연결과 금강산 육로관광문제를 협의하는 척하면서 남측의 쌀만 챙기고는 또 등을 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은 2월 임동원(林東源) 특사의 평양 방문도 그렇게 이용했다. 무슨 선심 쓰듯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만 응한 후 대화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봄 파종기에 시급한 남측의 비료만 챙겼다.
▼외면하는 것도 방법▼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은 무엇보다 서로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공존의 게임이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게임은 그게 아니었다. 남측은 북측이 의도적으로 규칙을 깨도 온정주의와 조급한 성취욕 때문에 불공정 게임도 마다하지 않고 해왔다. 북측은 그런 남측 사정을 교묘히 이용했다.
이제는 대화창구를 여는 일이 급한 게 아니다. 합의를 하면 꼭 실천해야 한다는 평범한 원칙을 북측이 지키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급한 성취욕과 온정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 북한의 ‘대화 미소’에 끌려 들어가면 햇볕정책의 ‘구멍’만 자꾸 커진다. 북한이 진실한 자세로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철저히 외면하는 정책도 필요한 시점이다.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