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340쪽 1만 3000원 창작과 비평사
올해로 한국의 실질적인 산업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된 지 만 40년이 된다. 우리는 그 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고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다소 섣부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은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통이 수반됐다. 한국의 산업노동자들은 이른바 수출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산업화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실질적인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이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실정이다.
이 책은 수출주도형 산업화정책이 시작된 1960년대부터 1990년대말까지 진행된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을 기술하고 한국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을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노동운동사 서적과는 사뭇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저작들은 대체로 한국 노동자들의 객관적 형성에 몰두하고 노동운동의 전개과정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데 치중한 바가 적지 않아, 한국노동운동의 독특성을 밝히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구조적 결정을 탈피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주체적으로 형성돼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떻게 공장노동자들이 경멸적인 문화적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 및 순응의 강요를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집합적 정체성을 갖게 됐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화두다.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이 같은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했다.
저자의 이런 관점은 책의 제목에서 풍기듯이 E P 톰슨의 역작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논리를 많은 부분 답습한다. 톰슨은 이 저작을 통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자들의 계급형성론이 지배하던 당시 지적 분위기에 신선한 자극을 던졌다. 톰슨에 따르면, 사회계급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생활체험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다. 요컨대 이런 구체적 생활체험은 생산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 내부와 외부에서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정치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저자는 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구조로부터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환원주의적 또는 본질주의적 접근은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 노동자들의 구체적 경험은 유교라는 문화적 전통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이 돋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 같은 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노동운동을 도식적 분석이나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수많은 1차 자료 그리고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노동자들 및 노동조합활동가들의 증언을 통해 노동자들의 진솔한 삶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다채롭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또 하나’의 노동운동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노동현장사이자 노동자들의 삶의 역사서이다.
정헌주 고려대 강사·사회학 박사 gaifo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