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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위정척사파와 춘천-양평-부안

입력 | 2002-07-14 17:43:00

노산정사(蘆山精舍) 입구에서 그를 극진히 모신 외손부(外孫婦)의 후손이라는 노인이 조용히 잡초를 뽑고 있었다.


“아! 우리 팔도 동포들이여, 망해 가는 이 나라를 내버려두려 하십니까. 대대로 500년 조선왕조의 유민(遺民)이 아닌 이 없거늘 내 나라 내 가정을 위해 어찌 한두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단 말입니까….”

1895년 말 ‘팔도 방방곡곡에 알리는 격문(檄告八道列邑)’을 전국에 보내며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의 깃발을 들었던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1842∼1915). 그는 지금 강원 춘천 남면 가정리의 묘역에서 곧게 뻗은 장대한 소나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이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한일합방을 거쳐 1915년 연해주에서 타계하기까지 계속되는 유인석의 장정은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가정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대규모의 유적지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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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의 주력군이 된 호좌창의진은 충북 제천에서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참형에 처하며 의병진의 결의를 전국에 선포했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충주성에 입성해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며 그의 깃발 아래에는 전국에서 의병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유생들이 전면에 나선 이 의병은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병이었다. 이를 주도했던 유생들 중에는 유난히도 화서학파의 문인들이 많았고 유인석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1868)의 학맥을 이은 이들은 중화사상과 주자학의 정통계승자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이항로가 평생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했던 노산정사(蘆山精舍)가 있는 경기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그곳은 정약용의 생가에서 북한강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곳이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말년의 정약용과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게 되는 30년 연하의 이항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면서도 서로 만났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미 가는 길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깨끗하게 보존된 노산정사는 마을 한가운데서 조용히 시대의 흐름을 관조하고 있다. 그 앞에서는 이항로를 극진히 모셨다는 외손부(外孫婦)의 후손이라는 노인이 하얀 한복에 하얀 두건을 쓰고 묵묵히 잡초를 뽑고 있었다. 시대가 아무리 급변해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이곳에서 이항로는 제자들과 성리학을 공부하며 시대를 논했고, 그 가르침 속에서 당시 가장 실천적 유생이었다는 화서학파가 탄생했다.

물론 당시 유생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의병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침탈이 극심해지고 1895년 말 단발령까지 공포되자 유인석과 문인 사우들은 함께 대처할 방안을 논의했고, 이 때 세 가지 방법이 제기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自靖致命·자정치명), 의병을 일으켜 외세를 소탕하는 방법(擧義掃淸·거의소청), 조국을 떠나 혼자서라도 대의를 지키는 방법(去之守義·거지수의).

‘자정치명’은 뒷날 민영환 황현 등이 취한 방법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인 데다가, 모두가 이 길을 택할 경우 뒷날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거지수의’는 지조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위급한 나라의 상황을 외면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인석을 비롯해 많은 유생들이 택했던 길이 바로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의소청’이었다.

계화도에 있는 계양사 -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화서학파, 노사학파, 한주학파, 간재학파 등 당시 조선의 유림을 대표했던 4개의 학파는 모두 서구와 일본의 물리력에 대한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성리학의 재무장을 시도했지만, 그들이 택한 실천의 길은 조금씩 달랐다. 화서학파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9)의 노사학파는 주로 ‘거의소청’의 길을 택했고,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1818∼1886)의 한주학파는 서구의 기독교에 맞서 공자교 운동을 일으키거나 전세계에 일본의 침탈을 알리는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의 간재학파는 현실 참여보다는 외롭게 도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 전우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제자들을 이끌고 전북 부안 계화도로 들어가 다시는 뭍을 밟지 않았다. 도를 실현할 수 없을 만큼 시절이 혼란할 때 은둔해 도를 지키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도 택한 길이었지만, 의병에 가담하라는 제의도, 파리장서에 서명하라는 제의도 거부했던 그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썩은 유자(腐儒)’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내적 개혁보다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는 것이 시급해 ‘위정척사’의 깃발 아래 모이기는 했지만, 이른바 ‘위정척사’ 의병진이 모두 위정척사사상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의병장은 유생이었지만 병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농민군과 수탈이 점점 더해 가는 상황에서 의지할 데가 필요했던 농민들이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회복하려 했던 의병장들과 이미 평등한 이상사회의 실현을 시도한 경험을 가진 병사들은 불과 1년 전 서로 적이었고, 이들은 의병 전쟁의 와중에서도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위정척사파 유생이 지키려 했던 조선성리학은 이미 절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권좌에서 밀려나 개화사상, 동학, 서구 민권사상 등 당시의 여러 사상 중에 하나로 시대의 변화에 힘겹게 대응해 가야 했다.

전우가 고고히 도를 지키겠다고 은거했던 계화도조차 이미 뭍에 연결됐고, 그가 머물렀던 계화재(繼華齋)도 이제는 일상적 삶에 분주한 인가에 겹겹이 싸여 있다.

▼의병전쟁서 드러난 위정척사파 현실과 이상▼

유인석의 묘역(위)과 그의 사당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유적지 조성공사가 진행중이다. - 사진=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위정척사 의병이 일어난 1895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1년,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난 지 1년이 된 시기였다.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 때 성리학적 이상국가와 중화문화의 회복을 주장했던 위정척사사상이 부상한 것은 사상사적 퇴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위정척사사상은 사상 그 자체보다도 역사상의 기능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와 일본의 침탈로 국권은 위태로운 데 이들과 맞설 근대적 민족의식도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을 결집시킬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고, 당시 위정척사사상은 현실적으로 외세와 맞서며 이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었다.

화서학파, 노사학파, 한주학파, 간재학파 등 당대를 대표하는 유림들은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전통적 문제들에 대한 논쟁을 통해 성리학의 정통을 고수하는 이론적 입장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화서학파는 철저하게 주리적(主理的) 성향을 나타냈고 노사학파는 거의 유리론(唯理論)에 가까운 이론을 제기하며 성리학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의병전쟁을 겪으면서 위정척사사상은 시대적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의병전쟁 초기에는 유생 의병장들이 주도하면서 의병진의 반침략적 성격을 강력히 드러냈지만,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가졌던 평민들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의 반봉건적 성격이 서서히 부상하게 됐다. 의병운동의 내용도 일제에 대한 반대뿐 아니라 납세거부, 소작료 납부거부, 부호재산 탈취, 악질 양반 응징 등으로 확산됐다.

사실상 1894년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의 잔존세력은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 형태를 바꾸면서 투쟁을 계속해 왔고, 의병전쟁 기간에 양반 유생들의 활동이 뜸했던 때에도 이들은 나름대로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선 조선에서는 반봉건 운동을 사회변혁운동으로 이끌어 갈 만한 민족자본가도 노동자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해 대중적 에너지를 계속 결집시켜 나갈 노선을 제시할 수 없었던 유생들은 그 지향점에 있어서 의병들과의 차이점이 드러나면서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 뒤를 이을 선진계급도 부재한 상태에서 미국과 영국 등의 원조와 지지까지 받는 일제와 맞선다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의병전쟁이 만주에서 독립전쟁으로 전환된 후 벌어진 노선의 혼란도 이미 노정된 것이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