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독일.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자신감과 세계를 뒤흔든 투지는 이미 그들에게 없었다.두 번이나 큰 사고를 치고 패한 독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포츠담 협정에 의해 오더-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를 상실하는 것과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연합국의 점령이었다. 게다가 뉘른베르크의 군사재판에 이어 비(非)나치화 정책을 강행한 연합국은, 재건을 둘러싸고 독일을 회치던 시절이었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서독에선 발빠른 개발이 이뤄진다. 1949년 10월에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1951년 4월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맹하였고, 또 1952년 5월 26일에는 미국·영국·프랑스·서독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점령체제가 정식으로 종결된 것이다. 서독은 1954년 10월 23일 서방 9개국에 의한 파리협정 결과로 주권이 회복되었고, 뒤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서유럽연합(WEU)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독의 경제는 엉망이었다. 한때 영국과 맞서던 경제력은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고, 배급과 절망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 ll)의 단편소설 '지나간 시절의 빵(Das Brot der fr heren Jahre)'엔 당시 독일 사회의 절망과 좌절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토록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기에 독일은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한다. 1953년부터 시작된 제 5회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 나간 독일은, 오슬로에서 노르웨이와 1:1로 비기고, 당시엔 프랑스령 자치구로 따로 떨어져있던 자를란트(1957년 반환)를 슈투트가르트로 불러들여, 3:0으로 대파했다. 다시 노르웨이를 함부르크로 불러들여 5:1 대승을 거두었고, 마지막으로 자르브뤼켄에서 열린 자를란트와의 경기에선 다시 3:1의 승리를 거두며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서 독일은 B조에 헝가리, 터키,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은 조에 배정된다. 당연히 시드는, A매치 27연승을 구가하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가 받았다. 우리는 헝가리와 터키에게 각각 0:9와 0:7로 지는 바람에 독일과의 첫 공식경기가 무산되었지만, 약체로 분류되던 독일은 터키를 4:1로 격파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다음 상대는 세계 최강 헝가리와의 경기였다. 피렌체 푸스카스와 산도르 코시스, 난도르 히덱쿠티로 이어지는 공포의 삼각편대를 앞세운 헝가리는 이 대회 득점왕인 코시스의 4골을 앞세워, 바젤의 장크트 야콥 경기장에 모인 6만 5천 관중 앞에서 서독을 3:8로 난도질했다. 1승 1패가 된 서독은 터키와의 순위 결정전에서 7:2로 이기면서, 힘겹게 8강에 합류하게 된다. 준결승전에서 서독이 만난 상대는 A조 2위인 유고슬라비아.
이반 호르바트의 자책골로 힘겨운 리드를 지키던 서독은 헬무트 란의 종료 직전의 쐐기골로 간신히 4강에 진출한다. 반면 헝가리는 역시 실력답게 A조 1위 브라질을 4:2로 가볍게 물리치고는 4강에 합류한다. 대진운이 아주 좋았던 서독은 4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6:1로 격파하며 결승에 선착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잉글랜드를 4:2로 이긴, 우루과이를 4:2로 꺾으며 우승후보 셋을 차례로 격파하였고, 역시 우승후보 0순위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베른의 반크도르프 스타디움에서 결승전이 열렸다. 6만 관중이 가득 메운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두 골을 먼저 넣으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 최강 헝가리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구츠타프 세베스 헝가리 감독의 자랑스런 대표팀은 연이어 실점을 하게 된다. 막스 모어록의 추격골과 헬무트 란의 동점골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종료 6분 전에, 다시 헬무트 란의 천금같은 결승골이 터진 것이다. 더 이상의 골은 없었다.
경기종료와 함께 모두가 경기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헬무트 란은 완장을 차고있는 자신의 주장, 프리츠 발터(Fritz Walter)에게 뛰어갔다. 팀의 인사이드 레프트(inside-left) 자리에서, 약체 서독을 격려하고 추스르며 우승시킨 그라운드의 야전 사령관이 바로 발터였기 때문이다. 제프 헤어베르거의 전술도 발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리에 상관없이 날려주는 긴 패스와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미드필드를 장악하는 솜씨는 당시 서독에 있기 아까운 선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베른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당시 서독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민들이여 국경까지 나아가 우리의 영웅들을 마중합시다."
발터와 그의 팀이 비탄에 빠진 조국으로 줄리메컵을 가져온 것이다. 이번 월드컵이 끝나고 준우승한 대표팀이 그랬듯이, 유서깊은 프랑크푸르트의 '뢰머' 발코니에서 성대한 축구잔치가 열렸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날만큼은 서독 국민들에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죽었다.
우베젤러, 프란츠 베켄바워 그리고 로타어 마테우스와 함께 독일의 명예주장이며 1954년 독일 우승의 주장인 프리츠 발터가 6월 24일, 81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발터의 옛 팀인 카이저슐라우테른의 언론담당관 미카엘 노박의 말을 빌자면, 그는 그의 집이 있는 엔켄바흐 알센본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한다.
독일을 위해 61경기를 뛰었으며 33골을 기록했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독일에 줄리메컵을 선사했던 그였다. 카이저슐라우테른의 명예시민이기도 한 그는, 카이저슐라우테른에서 뛰던 시기엔, 팀을 1951년과 1953년 두 번의 독일 챔피언에 등극시켰고, 평생을 카이저슐라우테른에서 뛰고 1959년 은퇴했다. 그래서 독일이 지난 월드컵 때인 2002년 6월 21일 울산 문수경기장에서 있었던, 미국과의 8강전에서 검은 완장을 두르고 경기를 했던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이는 FIFA가 독일축구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독일축구협회장인 게르하르트 마이어-포어펠더는 프리츠 발터를 '독일 축구 협회의 선수 중 최고의 인물'이라고 표현했으며, 월드컵 방문을 잠시 접고, 독일 축구 협회 비서관 호르스트 R. 슈미트와 함께 축구 전설의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독일로 가기도 했다.
6월 30일 11시에 카이저슐라우테른의 '프리츠 발터 경기장'에서 행해졌던, 공식적인 장례식 때엔 북쪽 출입구에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조문록이 놓였다. 그리고 프리츠 발터는 가까운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묻혔다. 독일 전역은 비통에 잠겼고, 언론의 머릿기사는 그들을 실의에서 희망으로 안도했던 늙은 영웅에 대해 할애했다. 아직 20대인 필자보다도 더욱 그를 가까이서 느꼈을 독일인들의 애도문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조의를 표하려한다.
"프리츠 발터의 죽음은 경약스러움에 빠지게 한다. 독일의 명예 주장인 그는 나에게 혹은 나와 같은 세대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나날의 희망찬 우상이었다. 그는 공정하고 흠잡을 곳 없는 스포츠맨쉽의 총체였다. 1954년의 성공은 프리츠 발터라는 이름과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 '베른의 기적'은 프리츠 발터만의 것은 아니었다. 프리츠 발터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손실이다. 명예로운 기억으로, 그의 고향인 팔처 지역에서 진실된 삶을 보낸 그를, 우리는 기려야 한다." from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연방 총리)
"프리츠 발터는 우리나라를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다. 운동선수로서 그의 훌륭한 재능과 그의 팀을 위한 정신은 수많은 독일인들을 열정과 확신으로 채워줬던 '베른의 기적'에 공헌했다. 그의 긴 선수 생활동안, 그는 축구천재들에게, 공정함과 겸손함의 모델이었다. 선수 생활 뒤에도 그는, 독일의 다른 어떤 유명했던 운동선수들과는 달리 세대를 초월해 사랑 받았다. 그가 제프 헤어베르거와 많은 젊은 선수들과 이룬 일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from요하네스 라우 (독일연방 대통령)
"프리츠 발터를 잃음으로 독일축구계는 큰 별 하나를 잃게 되었다. 1954년 팀의 주장으로서 우승의 승리를 가져다준 그의 업적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독일 축구 협회의 이 첫 번째 타이틀은 성공적인 것이었으며, 스포츠적인 의미를 넘어서 보다 중요한 독일 사회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프리츠 발터의 자기 고장에 대한 충실함, 카이저슐라우테른 축구팀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겸손한 방식들은, 오늘날까지도 팔츠의 경계선을 넘어서 그를 우리의 우상으로 남게 해준다. 독일축구협회는 그들과 모범적인 방법으로 일체감을 가졌던, 명예 국가대표 주장인 그를 추모한다." from 게르하르트 마어어-포어펠더 (독일축구협회장)
"프리츠 발터와 또 어느 날, 1954년 7월 4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난 그 당시 8살이었다. 뮌헨 한쪽의 기싱에서 난 다른 애들과 베른에서 펼쳐지는 헝가리와의 경기를 들었다. 독일이 멋지게 3:2 승리로 우승을 하자 우리는 길을 뛰어 다니면서 축제를 벌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프리츠 발터는 선수로서 내게는 확연한 목표였다. 그 당시의 흑백 화면을 보여주면, 여전히 집중해서 보게된다. 프리츠가 공을 갖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그는 공을 마치 당구공처럼 정확하게 다룰 수 있는 재능을 보여줬다. 그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공을 다룰 수 있었다. 심오한 스루패스, 달려가는 동료를 향한 직접 패스, 세련된 뒷꿈치 패스와 회전을 강하게 먹인 코너킥 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 감동시킨 것은 그의 인간됨이었다.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서도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애향심은 가히 전설적이다. 어떠한 외국에서의 귀화에 대한 금전적 요구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거절 할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축구는 여전히 순수하고 깨끗했던 것 같다. 그는 관대했고 사회적이었으며, 다른 사람과 진실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De Fritz'라고 불리웠던 그 사람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프리츠 발터, 내 삶의 우상, 그가 죽었지만 영원히 그는 내 우상으로 남을 것이다." from 프란츠 베켄바워 (2006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장)
"우리 아버지는 그가 100년 혹은 1,000년 후에도 나오기 힘든 선수라고 강조하셨다.
그는 결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항상 심플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우상 이상의 존재이다." from 루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