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해헌(宗海軒)은 양천현(陽川縣·지금의 강서구) 관아의 동헌(東軒·지방 수령의 집무소) 이름이다. 그러니 ‘종해청조(宗海廳潮)’라는 그림의 제목은 양천현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밀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양천현 관아가 현재 양천향교의 서남쪽 가양1동 239 일대인 성산 남쪽 기슭 한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서해 바다는 조석간만(潮汐干滿·밀물과 썰물)의 차가 뚜렷한 지역인데 그 중에서도 한강물이 바다로 물머리를 들이미는 강화만 일대는 그 격차가 가장 큰 곳이다. 그래서 밀물때가 되면 조수가 한강으로 역류해 들어와서 강물의 흐름을 막는다.
자연히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밀리지 않으려 힘겨루기를 하게 되고 이 때 나는 물싸움 소리가 마치 거대한 소나무 숲속에서 이는 솔바람 소리와 흡사하다 한다.
쏴아! 쏴아! 울려퍼지는 이런 물들의 함성을 종해헌에 앉아 듣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제목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서 겸재라고 생각되는 벼슬아치 하나가 종해헌 2층 누마루 난간에 기대앉아 있다. 이때 한강에서는 밀물이 강물을 제압하며 사나운 기세로 역류해가고 있는 듯하다. 돛단배들이 모두 조수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듯 돛폭이 바닷바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닷물에 되밀려 오르는 강물의 함성이 얼마나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겠는가.
이 그림은 관아 뒷산인 성산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동헌인 종해헌을 중심에 놓고 부속 관사와 부근 일대의 민가까지 그려서 당시 양천읍의 전모를 화폭 한 쪽에 담고 있다.
조수가 밀려드는 드넓은 한강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난지도를 비롯한 모래섬들을 강 건너에 수없이 그려놓고 돛단배도 아래위로 여러 척 띄워놓았다. 그리고 강 상류에는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관악산을 먼 산으로 그려놓고 있다.
남산 아래로 겹겹이 이어지는 낮은 산 언덕들은 노고산, 와우산, 만리재 등일 것이고 관악산 아래의 낮은 산은 동작동 국립묘지가 들어서 있는 동작봉이리라. 허가바위가 있는 탑산을 가까이 끌어내 앞산을 삼았는데 돛단배 몇 척이 허가바위 절벽 아래를 스쳐 지나도록 아련하게 표현했다. 종해헌 앞의 강물 위를 지나는 두 척의 배와는 크기가 한 눈에 비교될 만큼 차이난다.
강바람을 막기 위해 한강변으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고, 종해헌 뒤편 산 언덕에는 늙고 큰 고목나무가 우람하게 솟아 있어 관아의 역사를 말해준다.
종해헌이란 이름은 ‘모든 강물이 바다를 종주(宗主·우두머리)로 삼아 흘러든다’는 ‘서전(書傳)’ 우공(禹貢)편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이 모든 강물을 대표하고 한강물은 양천 앞에서 바닷물과 부딪치므로 이 곳이 바로 종해(宗海·우두머리 바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는 조선이 곧 중화문화의 주체라는 조선 중화주의에 입각한 자부심에서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를 창달해 갈 때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방한 이름이다.
‘종해헌’이란 현판 글씨를 만교 김경문(晩橋 金敬文·1602∼1685)이 숙종 5년(1679)에 써 걸었다 하니 아마 그 이름도 이때 처음 지어졌을 것이다.
이 시기는 진경문화가 막 태동하던 때였다. 김경문은 중종(1506∼1544) 이후 이 지역에 명문으로 뿌리내린 원주(原州) 김씨 문중이 배출한 명필로 이 글씨를 쓸 때 나이가 78세였다고 한다.
지금은 행주 하류에 수중보를 막아서 물길을 고의로 차단했기 때문에 조수 밀리는 소리가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군사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이 인공보가 언제 철거되어 ‘종해청조’의 옛 풍류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2㎝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