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허균평전’을 읽다보니 연암 박지원이 허균을 일러 다음과 같이 말한 게 나왔다. “사교(邪敎)가 동쪽으로 온 것도 아마 허균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 사교를 배우는 무리들을 돌아보면, 바로 허균의 잔당들이다.”
과연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두 해를 잇달아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수천 권의 책을 사들여왔는데, 이 즈음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을 개연성이 높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베이징에서 출간된 건 1603년의 일이다.
1614년이란 연도가 얼른 눈에 들어온 까닭은 이 해가 우리 역사에서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는 이미 예수회를 세우는데 참여했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천주교를 전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말하자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문물을 전해온 셈인데 임진왜란까지 겪은 조선에만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회가 조선을 그냥 내버려둔 것만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4년 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몰래 경상도 웅천에 자리잡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종군신부로 들어온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정황은 엔도 슈사쿠의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와 외국어대 박철 교수의 ‘세스페데스’에 보면 나온다.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려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계획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대신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인 고아 두 명을 데리고 일본의 예수회 신학교로 데려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권 빈첸시오라는 사람이다.
교리 강설을 잘 했다던 권 빈첸시오는 1614년 후안 바우티스타 솔라 신부와 함께 조선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바로 새로운 책에 목말라하던 허균이 베이징으로 간 해다. 허균은 권 빈첸시오보다 열세살이 많았다. 하지만 둘은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4년 뒤, 허균은 역적으로 판명돼 처형당했고 다시 8년 뒤, 권 빈첸시오는 일본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정세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때문에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졌다. 하지만 최대 피해자인 조선만은 그대로였다. 17세기 초 비참하게 죽어간 허균과 권 빈첸시오 중 누구 하나라도 자기 뜻을 이뤘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일은 오래된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기차를 놓친 뒤에야 그 시간표가 잘못됐음을 알게 된다.
김연수 소설가 larvatus@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