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남아 있는 정제두의 묘(사진제공 오철민 녹두스튜디오대표)
《1893년 봄, 조선의 뛰어난 문장가요 지조 있는 관리로 명망이 높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전남 보성으로 귀양을 떠나던 날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남대문 밖 길목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파루(罷漏)를 알리는 쇠북소리와 함께 육중한 성문이 열리면서 걸어나오는 죄인과 호송관을 멈추게 한 뒤, 이건창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이는 민영규 전 연세대 교수가 저서인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우반)에서 전하는 강화학파의 한 장면이다. 개화파와의 갈등으로 귀양을 떠나게 된 이건창을 새벽길에서 맞은 것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1870∼1917)이었다.》
이건창이 보수적 입장에서 강화학파의 학통을 계승 실천한 조선 선비의 마지막 세대였다면, 이상설은 이준 열사와 함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독립전쟁을 벌이게 되는 새로운 세대의 선구였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를 막론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던 국난기에 조선후기의 비주류 지식인 집단이었던 강화학파의 맥을 잇는 지식인들은 이렇게 뜻을 이어갔다.
강화학파의 탄생지인 강화도는 우리 국토 중에서도 참으로 쓰리고 아픈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의 국경이 넘나들었고 고려시대에는 몽골항쟁의 근거지,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의 격전지이기도 했으며, 1876년 일본에 의한 굴욕적인 개항이 이뤄지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를 시작하며 처음 찾은 곳도 이곳의 마니산 참성단이었고 이 여정을 거의 마감해 가며 다시 찾은 곳도 강화도다.
이곳을 터전으로 형성된 강화학파의 학문은 양명학(陽明學)이었다. 주자학 일색의 조선에서 이단으로 배척되는 양명학을 따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미 1680년 윤휴, 1703년 박세당 등 조선의 저명한 학자들이 주자학과 다른 견해를 펼친다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었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강화도에도 강화학파를 기억할 만한 별다른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강화도에 양명학을 심은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1649∼1736)의 흔적조차 강화도의 서남쪽 한켠에 쓸쓸히 무덤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후손으로 서인(西人)의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정쟁이 계속되는 정국을 보며 일찍부터 관직을 떠나 학문에 전념했다. 그리고는 60세에 강화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이곳에서 이른바 ‘강화학파’를 길러냈다.
그러나 정제두의 시대는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이 벌어지면서 조선의 주자학이 더욱 강화돼 가는 시기였고, 그의 학문은 세상에 드러나기보다는 강화도에서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연마되며 전해져야 했다. 이로 인해 노론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을 중심으로 정제두의 후손과 강화도에 근거지를 둔 전주 이씨의 일파가 주축이 돼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비주류였지만 사제관계와 혼인을 통해 학맥과 혈맥이 결합된 견고한 집단을 이뤘다.
정제두는 외적(外的) 대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했던 주자학과 달리, 진리는 인간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다는 양명학의 입장에 섰다. 내적인 반성을 통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진리의 기준을 찾고 이를 외적 대상에 적용하며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주자학에 비해 보다더 인간중심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양명학을 통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철저히 반성하며 시대에 맞섰고, 이런 그의 정신은 후학들에게 이어져 올곧은 선비 또는 목숨을 건 독립투사로 나서게 한 것이었다.
강화도 화도면에 복원된 이건창 생가
강화학을 계승했던 전주 이씨의 흔적은 강화도 남쪽 끝 화도면에 단정히 복원돼 있는 이건창의 생가로 남아 있다. 이건창은 정제두가 강화도에 왔을 때 그와 교류했던 이광사(李匡師)의 5대손이었다. 가학(家學)으로 양명학을 계승한 그는 개화파에 반대했고, 1894년 갑오개혁을 정변으로 단정하며 한양을 등지고 강화도로 돌아와 자주적으로 외세에 맞설 것을 주장했다. 1896년에는 해주관찰사에 임명됐으나 스스로 고도에 유배를 자원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후 강화학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건승, 이상설 등을 거쳐 일제강점기부터 국학의 진흥에 큰 기여를 한 정인보, 최근까지 강화학 최후의 모습을 전해준 민영규로 이어졌다.
이제 이들의 흔적은 강화도에 정형화된 유적으로 남아 그들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의 발길을 맞을 뿐이다. 하지만 모진 시련 속에서도 강화도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듯이, 강화학 역시 묵묵히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하며 한국철학사의 저변에 또 다른 정신적 광맥을 이루고 있다.
▼강화학파 양명학의 특징…강인함-현실도피 양면성▼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
기존에 ‘진리’라고 전해지는 것이 세상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 때 철학하는 사람이 시도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방향으로 열려 있다. 하나는 실제로 자연과 사회라는 대상에 나아가 진정으로 기존의 ‘진리’가 자연과 사회의 진실인가를 검증해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반성해 들어가 기존 진리의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워보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이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방법이 적절히 배합되어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선 후기에 전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나아간 것이 실학이나 개화사상이었다면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접근한 것은 강화학파의 양명학이었다.
정제두에서 비롯된 강화학파 양명학의 특징은 바로 이런 내면적 진리 기준의 추구였다. 정제두는 주희가 외적 대상의 이치인 물리(物理)만을 추구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물리’는 진정한 근본이 될 수 없는 헛된 도리(道理)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음 밖의 ‘물리’ 대신에 그가 추구한 것은 마음 안의 이(理)였고 그는 이를 진정한 ‘진리(眞理)’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입장을 따를 경우 지나친 주관과 감성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정제두도 이런 양명학의 약점을 알고 경계했다. 양명학적 방법은 경전에 대한 학습과 외적 대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는 주자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하면서도 깊이가 있지만, 내적 성찰에 치중할 경우 주관적인 감정에 관대해져 욕구를 따르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사회적 실천의 면에서 보면 극단적으로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강한 주체성의 확립을 통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적 강인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태의 변화를 외면하며 더 보수화되고 현실 도피적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양명학을 세운 왕양명은 모든 이의 마음이 곧 진리라는 주장을 설파하면서도 평등을 추구하기보다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농민봉기의 진압에 앞장섰고, 그의 후학들은 내면적 수양에 치중하기도 하고 세상의 변혁에 앞장서기도 하며 우파와 좌파로 나뉘었다.
정제두를 계승한 후학들도 깊은 내적 반성을 통해 세태와의 타협은 용납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간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