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권효기자
20일 오후 9시반 경북 영천시 고경면 덕암마을 앞 28번 국도. 포항방면으로 쥐색 중형승용차가 질주했다. 갓길에 설치된 이동식 레이저 과속단속기에 찍힌 이 승용차의 속도는 시속 145㎞. 과속단속을 하던 영천경찰서 의경들은 “130∼150㎞로 달리다 단속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영천시 고경면 3사관학교 못 미쳐 단포교에서 경주 안강까지 28번 국도 중 15㎞ 구간은 과속이 일상화된 곳. 그만큼 교통사고도 잦다. 2000년에는 이 구간에서 22명이 숨졌고 지난해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 들어서도 6월 말까지 5명이 숨졌다.
사망사고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1년에 평균 300여건 일어났다. 하루 한 건꼴이다. 국도변 도로 주민들은 이 구간을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입을 모은다. 주민들은 몇년 전 도로를 건너다 숨진 주민들을 위해 위령제를 올리기도 했다.
도로와 인접한 고경면 상덕리 고경초등학교 조순(曺淳) 교장은 “학생들은 무조건 지하도를 이용하도록 한다”며 “‘학교앞 천천히’ 표지판은 소용없고 신호를 무시하는 차가 많아 교직원들도 출퇴근 때 좌회전신호를 받아도 좌우를 또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운전자들의 과속. 4차로로 도로가 넓은 데다 비교적 직선구간이 길어 운전자들의 ‘밟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올 들어 6월 말까지 이 구간에서 과속으로 단속된 건수는 3만여건에 이른다. 이 중 80%가량이 벌점 15점에 범칙금 6만원인 20㎞ 이상 과속한 경우다. ‘늘 단속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과속이 좀 줄었다는 것이 이 정도다.
이 구간의 1일 교통량 2만9000대 중 중·대형 트럭이 30% 가까운 1만500대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승용차 1만7000대, 버스 1100대 정도다.
트럭은 상당수가 포항철강공단을 오가는 차량이라 철강을 가득 실은 경우가 많다. 이런 트럭은 시속 100㎞가량 달릴 경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도 별 소용이 없다. ‘도로사정이 좋은데 속력을 좀 내면 어떻겠느냐’는 운전자들의 잘못된 생각이 위험요인인 셈이다. 대형트럭이 자주 다니다 보니 도로 곳곳이 자주 파손되는 것도 위험요소.
중앙분리대가 전혀 없는 점도 운전자들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커브 구간에 부분적으로 꽂혀 있는 플라스틱 중앙분리봉도 부서진 것이 많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인 스키드마크가 곳곳에 중앙선을 가로지르며 흉물스레 그려져 있다. 난폭 운전구간이라는 증거다.
이 구간에 설치된 횡단보도는 모두 18곳. 횡단보도 앞에 다이아몬드형 감속표시(◇)가 있지만 속도를 줄이는 차량은 많지 않다. 영천에서 포항으로 출퇴근하는 박원필씨(43·영천시)는 “추월선으로 90㎞가량 속도로 달리면 뒤에서 오는 트럭들이 경적을 울리고 상향등을 비추면서 위협하곤 한다”며 “이 구간에는 모든 차량이 너무 빨리 달려 운전하는 게 늘 긴장되고 피곤하다”고 말했다.
5월 초 경주 안강 시티재에서 포항쪽으로 달리던 승합차와 영천 쪽으로 달리던 승용차가 정면 충돌해 3명이 숨지고 5명이 크게 다친 사고는 이 구간에 잠복하고 있는 위험이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경우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경북지부 박재영(朴哉泳) 안전조사과장은 “이 구간은 도로폭이 좁아 중앙분리대는 설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문제는 중앙분리봉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 중앙분리봉만 있어도 추월을 위한 중앙선침범 사고는 크게 줄일 수 있다. 미끄럼방지시설과 신호등도 증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박 과장의 지적.
고정식 단속기 3대는 위치가 알려져 단속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단속기 값이 워낙 비싸 증설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 그러나 모조품 단속기라도 증설할 필요가 있다.
현장에서 단속을 하던 영천경찰서 교통지도계 황일석(黃一錫) 경사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원칙적인 말이지만 규정속도를 지키며 운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문위원단〓내남정(손해보험 협회 상무) 설재훈(교통개발연구원 연구위원·국무총리실 안전관리개선 기획단 전문위원) 신부용(교통환경연구원장) 이순철(충북대 교수) 임평남(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교통사고종합분석센터 소장) 김태환(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장)
▽협찬〓손해보험협회
영천〓이권효기자bor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