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의 옛 시공관 건물 [사진=권주훈기자]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국내의 대표적인 문화공연장과 국립극장 등으로 활용되면서 공연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서울 중구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예술계 인사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현재 현대투자신탁 등이 임대해 사용 중인 4층짜리 이 건물(현 대한종금 소유)을 매입하기 위해 문화관광부가 최근 기획예산처에 관련 예산을 신청한 상태여서 시공관 복원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공관의 역사〓서울 중구 명동1가 54에 위치한 이 건물은 일제때인 1934년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져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까지 영화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59년 11월까지 시공관으로 불리며 문화공연장으로 활용됐다. 특히 1959년 11월부터 1973년 9월까지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면서 연극 오페라 무용 등 한국 ‘공연 예술의 산실’로 예술가들과 시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973년 10월 국립극장이 현재의 중구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이후 3년간 국립극장 산하 ‘예술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다 1975년 당시 대한투자금용(현 대한종금)에 매각돼 사무용 건물로 바뀌었다.
▽국내 공연예술장의 상징〓시공관은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가난한 예술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곳이었다.
‘한국 오페라의 대모’로 불리는 김자경씨(1999년 작고)는 1948년 1월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오페라인 ‘춘희’(베르디 곡)를 공연해 5일간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장안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또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씨(1998년 작고), 서민들에게 훈훈한 웃음을 준 인기배우 김희갑씨(1993년 작고) 등이 광복 이후 이곳에서 노래와 연극 등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올 4월 작고한 가수 현인씨도 1946년 시공관에서 독특한 창법을 이용해 처음으로 ‘신라의 달밤’을 불렀으며 가수 윤복희씨(56)는 7세에 이곳에서 데뷔했다.
▽시공관 복원 운동〓1993년부터 연극인 문인 등 예술계 인사들과 명동상가번영회 임원 등이 주축이 돼 정부로부터 시공관을 ‘보존건물’로 지정받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99년 정부로부터 ‘보존건물’로 지정받아 소유주 마음대로 이 건물을 헐 수 없도록 됐다.
이들은 지난해 6월 ‘구 국립극장되찾기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여 서명서를 여야 정치권과 문화관광부 서울시 등에 제출하는 한편 건물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도 펼쳤다.
올 3월에는 도영심(都英心) 한국방문의 해 추진위원장, 김정옥(金正鈺) 한국문예진흥원장, 김장환(金璋煥) 명동상가번영회장, 연극인 박웅(朴雄)씨 등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가한 ‘명동시공관되살리기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복원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대한종금이 1999년 파산해 건물을 매물로 내놓은 뒤 최근 문화관광부가 건물 매입을 위한 예산(400억원)을 기획예산처에 요구하면서 복원 운동이 새로운 계기를 맞고 있다.
시공관되살리기 추진위원장인 김재기(金在基) 한국관광협회중앙회장은 “시공관을 되살리는 일은 번잡한 상업지역으로 전락한 명동을 다시 ‘문화의 거리’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시공관이 공연장으로 복원되면 명동 인근의 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