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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교섭 시스템이 없다…정보없이 '구걸협상' 일쑤

입력 | 2002-07-23 18:39:00


《최근 ‘마늘협상 파동’으로 한국의 취약한 대외교섭 능력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났다. 당초 농림부의 실수로 결말이 나는 듯하던 이번 파동은 김성훈(金成勳) 당시 농림부장관이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통보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하면서 정부 부처 간 조정능력까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외 통상교섭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의 지적을 토대로 한국 통상교섭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등을 진단해본다.》

◆문제점·실패사례

“어민들이 자료를 내지 않아 협상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해양수산부가 실수로 빠뜨리고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1999년 3월 일본과의 어업협상은 한국 대외협상력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과의 쿼터배정 협상은 과거 어획고를 토대로 이뤄지는데 ‘어민들이 중요한 자료를 팩스문서로 엉성하게 보내는 바람에’ 누락됐다는 것이 해양부 주장이었다.

▽쌍끌이에 이어 꽁치와 명태도 협상 실패〓‘일본에 쌍끌이 어획고를 통째로 내줬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김선길(金善吉) 해양수산부장관은 황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다른 어획쿼터 일부를 쌍끌이 쪽으로 돌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정작 쌍끌이 조업실적은 2000년 4척이 28t을 잡는 데 그쳤고 2001년에는 아예 출어실적이 없었다. 사전 조사를 소홀히 한 탓에 결국 어민 주장에 정부가 끌려다니며 실익이 없는 구걸협상을 벌인 셈이다.

쌍끌이로 망신을 산 정부의 대외협상 능력은 이후 꽁치와 명태로 낙제점을 받았다. 2001년 러시아와 일본이 남쿠릴열도 주변 바다에서 한국어선의 조업을 금지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간다는 낌새를 눈치채고도 1개월여를 안일하게 대응하다 뒤통수를 맞은 것. 일본 언론이 조업금지를 보도한 날 해양부와 외교통상부는 “일요일이어서 현지 확인이 안된다”는 상식밖의 발언으로 일관했다.

올해 정부는 러시아와의 명태협상을 앞두고 14만t가량의 어획쿼터를 자신했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지난해와 달랐다. 지난해 한국이 많은 민간쿼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어민들이 처음 도입된 쿼터 입찰제에 반발하면서 참여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 그러나 올해는 러시아 어선들이 대거 몰려 쿼터가 모두 소진됐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민간쿼터 입찰 하루 전 나즈드라첸코 러시아 국가어업위원장에게 ‘작년과 같은 쿼터배정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훈장까지 줬다.

▽정부 조정능력 의심스러워〓정보 소홀은 대외 통상교섭시 ‘재앙’을 의미한다. 작년 11월 스페인에서는 대서양 참치보존위원회(ICCAT)가 열려 26개 회원국 260여명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 미국 일본 등 수산강국들은 공무원 과학자 변호사 등 25∼30명으로 구성된 협상단을 보냈다. 해양자원이 한국보다 빈약한 대만조차 1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한국은 해양부 사무관 1명과 산하 연구기관 연구원 1명 등 2명이 전부였다.

2000년 한중 마늘협상 파동은 정부의 조정능력까지 의심케 한다. 부속문서에 들어간 ‘자유로운 수입을 보장한다’는 구절을 놓고 외교통상부과 농림부가 장관까지 가세하며 해석상의 차이를 보였다. 세종법무법인 김범식 변호사는 “합의가 거의 끝나 조문작업 중에 ‘우리 부처 의견과 다르다’고 제동을 걸었던 부처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관련 공무원 잦은 이동〓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통상기능을 어디에 두는가’는 정부조직 개편의 핵심과제였다. 대외경제부 신설, 무역대표부(KTR) 신설, 외교통상부내 본부신설 등 3가지 방안이 마련됐다. 당시 정부조직개편 작업을 총지휘했던 이계식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대학원 교수는 “외통부에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하되 본부장은 경제관료 출신을 임명하고 인력도 경제전문가와 경제관료들로 40%까지 채우는 방식으로 3안이 채택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취지에서 통상교섭본부로 옮겨온 다른 부처 관료들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아 씨가 말랐다. 행자부에서 온 S국장은 파리로, 기획원출신 K과장은 독일로, 통상산업부 출신 A국장과 P국장은 제네바로 떠났다. 외교통상부 소속인 만큼 해외 순환근무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의 빈자리는 경제지식이 짧은 외무부 출신들이 채웠다.

▽우리사회의 컨센서스 부재〓또 하나 협상력 부재를 따질 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우리사회 내부의 ‘컨센서스’ 부재.대통령 공약사업인 한국-칠레간 자유무역협정은 제조업체와 과일재배 농가간 이해가 엇갈려 한치의 진전도 보지 못하고 있다. 김규복(金圭復) 재경부 경제협력국장은 “한국측의 개방안을 본 칠레 당국자들은 ‘이럴 바에는 뭐하러 자유무역협정을 맺느냐’고 되물었다”고 털어놓았다.

국가전략상 우선순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효율적인 교섭이 이뤄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성공한 통신협상

강대국이 아니면서, 대외의존도는 높고, 총체적인 협상시스템마저 부실한 한국에서 성공한 통상협상 사례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1989년부터 92년까지 진행된 한미통신협상 정도가 그나마 전문가들에게는 성공작으로 꼽힌다.

미국은 1988년 ‘슈퍼 301조’가 포함된 종합무역법안을 통과시켰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수입장벽 폐지를 요구한 뒤 해당국이 3년 이내에 이를 철폐하지 않으면 보복조치를 발동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미국이 이 조항을 적용, 한국을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두 나라는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미국은 통신기기에 대한 공공통신사업자 구매시장과 부가가치통신망사업의 전면 개방 등을 요구했고, 한국은 제한적이고 점진적인 개방을 주장하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통상전문가인 S변호사는 “시장을 개방했지만 한국의 통신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협상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협상이 끝난 뒤 미국에서 “강공으로 밀어붙이기만 했지 얻은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던 사실에 비춰봐도 협상결과가 한국에 크게 불리하지는 않았던 셈.

S변호사는 “1, 2년마다 자리가 바뀌는 공무원들의 전문지식 공백을 메울 민간 전문가들이 협상에 적극 참여한 점이 한미통신협상의 가장 큰 성공요인”이라고 말했다.

당시 통신개발연구원에 근무하던 성극제(成克濟)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교수는 87년부터 협상팀에 합류, 대책안 마련부터 통역까지 사실상 협상을 이끌었다. 성 교수의 뒤를 이어서는 역시 통신개발연구원에 근무하던 최병일(崔炳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전문가로 참여했다.

한국 대표가 협상 도중 불리한 발언을 하면 성 교수가 통역을 하면서 ‘실언’을 바로잡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도 민간 전문가들의 활동은 빛을 발했다.

성 교수는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라며 “협상 시작 2년 전부터 대책을 충분히 연구한 데다 미국의 통상전문변호사를 고용해 그들의 협상전략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경제기획원 상공부 외교부 등을 제치고 통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체신부가 확실한 협상 주도권을 가진 점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외국은…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들은 국제법과 통상 현안에 정통한 전문가들을 협상에 집중 투입,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미국〓모든 통상협상은 대통령 직속기구인 무역대표부(USTR)를 통해 이루어진다. USTR는 정부부처간 협의를 통해 현안에 대한 이견을 조정하는 한편 업계의 의견을 수용해 통상 교섭에 반영한다.

USTR는 소수정예의 조직이지만 통상교섭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져 힘은 막강하다.

한국 등과의 양자협상에는 USTR의 과장급이 수석대표로 나서고 현안에 따라 다른 부처의 차관보급이 협상단에 참여한다. 인력은 국제통상법과 협상실무에 밝은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USTR는 통상이익만 생각하고 외교적 고려는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공세적 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통상 전담조직은 없으며 외무성의 각 부서가 통상협상을 나눠 담당한다. 다자(多者)협상은 외무성 경제국이, 양자협상은 외무성 지역국이 맡고 있다.

그러나 경제분야의 대외협상에서는 외무성보다 해당분야에 정통한 주무 성청(省廳·부처)의 발언권이 훨씬 세다. 외무성이 이들 경제부처의 동의 없이 세부사항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제부처는 물론 외무성에서도 통상분야 대외협상을 맡는 부서에는 그 분야에 정통한 관료가 많다.

▽EU〓EU 집행위 산하 통상총국(DGT)이 통상협상을 담당한다. EU 자체가 당초 경제조직으로 출범한 데다 블록화를 통해 공동이익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대외 교섭을 담당하는 통상총국은 EU 집행위의 최고 핵심부서로 꼽힌다.

회원국 정부에서 파견한 공무원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EU 집행위가 공채로 뽑은 통상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10년 이상 통상만 파고든 변호사 출신이 수두룩하다.

EU 집행위에는 통상총국 외에 120여명의 변호사 출신으로 구성된 법률지원기구가 통상관련 소송을 직접 수행하거나 법적 절차를 지원하고 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