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마늘협상 파동은 우리 국정 운영시스템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란 지적이 일고 있다.
파문이 불거진 이후에도 외교통상부와 농림부 등 관련 부처가 ‘책임 떠넘기기’식 주장을 펴는가 하면 청와대도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밝힘으로써 국정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복지노동특보는 23일 “합의서 본문만 보고받았을 뿐 부속서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합의가 타결된 2000년 7월15일 오후 외교부는 외교안보수석실과 경제수석실에 각각 합의서 본문만을 보냈고, 이를 토대로 경제수석실에서 A4용지 1장 분량으로 할당관세물량 최소시장접근물량 등 합의서 본문 내용만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보고했다는 것. 결국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부속서에 담겨있던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연장 불가’ 합의내용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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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협상결과 보고과정에 대한 설명일 뿐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는다.
우선 당시 우리 정부의 세이프가드 조치와 이에 대응한 중국측의 무역보복 조치로 인해 협상 초반부터 ‘3년 뒤 세이프가드 해제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던 상황에서 청와대가 이런 내용에 대해 ‘보고가 없어 챙겨보지도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었던 한덕수(韓悳洙)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마늘농가 보호를 위해 30배 이상의 보복을 받는 정책은 국익에 맞지 않는다는 관련 부처 간에 컨센서스가 이뤄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미 세이프가드 해제에 대해 정부 관계부처 사이에 공감대가 있었음을 강조한 대목.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청와대도 이런 내용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셈이다. 일부 핵심관계자들의 ‘허위증언’ 가능성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이에 대해 이 특보는 “당시 협상은 전적으로 관계 부처 간의 협의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명했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 않다.
더욱이 협상 이후 마늘농가에 대한 구조조정자금 4300억원이 지원되는 등 사실상 세이프가드 해제를 전제로 한 정부의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2년이 넘도록 세이프가드의 연장불가내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 관계자들 간에는 “당시 마늘협상팀과 이를 지휘했던 통상교섭본부의 독선적 비밀주의와 성과 과시주의가 낳은 파행이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즉, 각 부처가 자신의 업적만 드러내려 했을 뿐, 어느 부처도 예상되는 문제를 치밀하게 챙겨 대응하는 노력은 없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국정의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청와대에서조차 제대로 보고를 받지도 챙기지도 못했다는 데 대해 정부 실무 관계자들은 “국정의 통합조정기능이 아예 부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